건강도서/세계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

2권2장. 그들은 이렇게 미국을 지배해 왔다 4

생활건강 연구가 2019. 12. 29. 07:00


2권2장. 그들은 이렇게 미국을 지배해 왔다 4


  ※ 독후감


 구 소련의 최대 후원자는 록펠러 가문이었다. 록펠러가 구소련에 휴가를 다년 온 후 당시 최고 권력자인 후르시초프를 실각된 사실은, 록펠러가  후원자를 넘어 소련의 수뇌를 조종하는 최고 실권자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록펠러 가문은 소련의 발전을 위해 원자폭탄, 우주 왕복선 등 온갖 기술을 이전해 주었다. 미국의 적인 소련이 강해져야 군수산업이 발달하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 한국 전쟁 등을 일부러 장기화 시킨 것은 군수산업의 부흥에 목적이 있었다.


 오늘날 중국의 발전도 록펠러가 지원하고 있으며 최혜국 대우를 해주고 있다. 금융자본가들이 공산국가의 지원은, 세계를 지배하려는 그들의 목적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생활건강연구가  생태농부



2권2장. 그들은 이렇게 미국을 지배해 왔다 4


  ◇ 록펠러 가문이 후원자였던 공산주의 소련


 이번에는 마지막 세 번째 부문인 소비에트 연방과 관련해 록펠러 가문과 공산국가 소련, 그리고 중국의 관계를 소개하겠다.


 공산 소련이 설립되는 과정에서 초거부들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잔인한 정신세계를 여실히 보여줬다. 이 사람들은 평소에 사람들 앞에선 온후하고 친절한 신사의 가면을 쓰고 있다. 사실 어떤 인간이든 천사와 악마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매우 강한 악마성이 항상 그것도 압도적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한 예가 스탈린이나 마오쩌뚱이 보여준 반대파에 대한 잔인한 탄압이다. 


 재정 러시아를 타도할 때 자금을 대 준 곳은 구미의 로스차일드 은행이다. 1917년에 볼셰비키가 정권을 탈취하고 5년 뒤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하기까지 레닌과 손을 잡고 러시아를 발전시킨 주역은 록펠러 가문이었다. 스탠더드 석유(초대 록펠러가 만든 회사)가 진출하는 곳에는 항상 체이스 내셔널 은행(체이스는 록펠러 2세의 은행이며 현재는 제이피 모건 체이스 은행이 되었다)이 대규모 투자를 실시했다.


 이 스탠더드 석유는 분명히 국유화되었을 터인 노벨(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의 형 로버트) 소유의 광대한 유전 중 50%를 사들였다. 1927년에는 러시아 혁명 이후 첫 미국기업의 투자가 된 석유 정제소를 건설했다. 그 직후 유럽에서 소련 석유를 판매하는 계약이 맺어져 공산당에 7,500만 달러의 대출이 성사되었다. 또 1928년에는 러시아 공산당 채권을 체이스 은행이 미국에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록펠러 가문은 공산 러시아의 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한편 로스차일드 가문의 이름은 어째서인지 소련과의 비즈니스에 그다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69년 10월 20일에 록펠러 가문의 사람이 경영하는 국제 기초경제회사에 로스차일드와 아들들의 회사가 공동 경영자가 된 정도다.(중략)


 이것은 로스차일드 가문 내부의 주도권이 영국에서 프랑스로 넘어갔음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영국이 유로로 전환하지 않고 자국 통화인 파운드를 계속 고집하고 있어 에블린의 발언권이 약해졌기 때문은 아닐까? 여담이지만, 현재 로스차일드 가문의 당주인 데이비드는 "초대 마이어 암셸처럼 자식들을 세계 각국에 보낸다면 어디로 보낼 것인가?"라는 질문에 "한 명은 러시아로, 한 명은 미국으로 보내고 나머지 한 명은 유럽에 남겨 둘 것이다"라고 대답하고, "만약 자식이 더 있다면 아랍에미리트 연방으로 보낼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러시아 제국 시대에 미국 대사였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레닌은 권력을 잡은 뒤 곧바로 뉴욕의 쿤 로브 상회에 600만 루불을 송금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공산 러시아 설립의 주류는 미국 세력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관계상 록펠러 가문은 공산당 내부에 상당히 깊이 침투해 있었다. 이를 증명하는 좋은 예가, 1935년 이후에도 스텐더드 석유의 이권이 그대로 러시아 국내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공산주의의 이론상으로 외국 기업이 가진 이권은 모두 몰수 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덴마크 전보 회사의 이권이나 일본의 어업, 석탄, 석유 이권은 모두 몰수되었다. 그러나 스텐더드 석유만은 특별 취급을 받은 것이다.


 이와 같은 식으로 록펠러 가문은 러시아 국내의 경재 발전을 도울 뿐만 아니라 미국 국내에서 공산당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작전을 꾸몄다. 먼저 그들은 광고회사와 계약을 맺고 미국의 일반 시민이 품고 있는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없애기 위해 캠페인을 시작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단순히 오해받고 있는 이상주의자일 뿐이다. 호히려 그들은 인류에 은혜를 베풀 사람들이다."


 또 1922년에는 미국 러시아 통상협회를 뉴욕에 설립했다. 이곳에서는 러시아의 원자재를 미국에 수출하고 미국의 면화와 기계류를 러시아로 수출하는 상업상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문제가 상담되었다.


  ◇ 소련의 기술 발전은 록펠러 가문 지원으로 가능했다


 1944년 6월에 스탈린이 "소련 국내의 대규모 산업시설 중 약 3분의 2는 미국의 도움과 기술로 건설되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미국 기업의 대대적인 투자가 있었던데는 이 통상 협회의 존재가 컸다. 미국의 한 애국적인 조직이 잡지에 "체이스 은행은 미국의 수치다"라고 썼지만 그들은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결과 소련 경제는 모든 분야에 걸쳐 미국의 기술 이전 덕분에 성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었다.


 이 경향이 특히 현저한 분야가 바로 군수 관련 분야다. 게리 앨런의 마지막 책 <신세계 질서에 '노'라고 말하라>의 제6장에는 '소비에트군과 군수 산업의 구축'이라는 제목으로 전문가들이 쓴 몇 가지 연구서의 내용이 요약되어 있다.


 미국 첩보기관이 1984년에 발표한 보고서에는 전 국방총성 정보국의 국장이며 현재는 은퇴한 토머스 크랩 중령의 "나는 소련의 우주 왕복선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것과 쌍둥이나 마찬가지였다"라는 발언이 실려 있다. 우주 왕복선의 설계도는 분명히 기밀일 터인데 나사는 구입을 희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에게나 판매했던 것이다. 나사는 이에 대해 "상업용 부품의 제조와 조달을 좀 더 원활히 하기 위해 설계도를 팔았다"라고 해명했다.


 1977년에 개봉된 영화 <007나를 사랑한 스파이>에는 군사기밀인 설계도가 소련으로 흘러들어가는 상황을 묘사한 장면이 있다. 본드가 처음 운전하는 수륙양용차의 옆에 타고 있던 러시아 여스파이가 본드도 익숙하지 않은 차 안에서 미사일 발사 스위치를 눌러 공중에 떠 있는 헬리곱터를 격추시킨 것이다. 본드가 깜짝 놀라자 여성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예전에 설계도를 본 적이 있어서 기억하고 있었어요"라고 대답했다.


 007의 원작자인 이언 플레밍은 영국 정보국 비밀 정보부에서 근무했었다. 그는 2차대전 중에는 실제로 안전보장조정국의 스파이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따라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소재로 007을 썼다는 이야기가 솔직히 수긍이 간다.


 믿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소련의 기술 중 90% 이상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제공받거나 훔쳐 온 것이다. 이러한 첨담기술의 대량 이전을 암시하는 것이 노벨상 수상자의 수다. 2008년까지 미국은 305명인데 비해 소련은 19명에 불과하다. 이를 보면 당시부터 미국에 비해 과학 기술이 상당히 뒤쳐져 있음은 명백하다. 소련이 미국보다 일찍 유리 가가린을 우주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국외에서 얻은 첨단기술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틀림없을 것이다.


 한편 록펠러가 기술을 소련으로 유출시키는 가운데 미국 정부는 소련을 위협의 대상으로 여기고 매년 750억 달러에 이르는 세금을 한국 전쟁이 시작되기까지 국방비로 사용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이 시작되자 국방비는 더욱 증강되었다. 그 후 1991년에 소련이 붕괴되기까지 외교문제평의회가 중심이 된 미국 정부의 소련 원조 작전이 국민들 몰래 계속되었다.


  ◇ 냉전시대에도 적에게 수출을 계속한 배경


 2차대전 후, 외교문제평의회는 한시라도 빨리 소련을 미국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계획을 꾸몄다. 퀴글리 교수는 냉전이 표면화된 2차대전 이후 미국이 소련을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뒤에서 지원해 왔음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 한 예가 바로 원자폭탄이다.


 소련은 첫 원폭 실험을 예상보다 몇 년이나 빠른 1949년에 실시했다. 이는 미국이 원자폭탄에 관한 기밀 정보를 우라늄 현물과 함께 소련에 제공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비극과 희망>에 실명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자신들의 적이 원자폭탄을 제조하도록 돕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냉전이 심해질수록 이익이 생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적이 강해질수록 군사비 증가가 쉽게 허용되기 때문에 군수산업으로서는 소련이 강해지는 편이 바람직했던 것이다. 2차대전 이후 핵무기를 중심으로 한 미소의 광기어린 군사력 경쟁은 일부 인간들이 미군의 상층부에 의도적으로 흘린 과장된 숫자가 군 간부들의 공포심을 부추긴 결과 계속 확대일로를 걸었다.


 5만 명에 가까운 미국인 병사가 희생된 베트남전쟁 역시 록펠러 가문의 의향을 받아들인 외교문제평의회가 움직여 정부 차원에서 장기화로 이끈 전쟁이었다. 물론 이런 사실은 정식 역사책에는 절대 나오지 않는다. 1964년에 미국이 날조한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북폭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점점 격렬해지던 1966년 7월 7일에 존슨 대통령이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유럽의 공산국가에 대해 최혜국 대우의 관세를 적용할 수 있는 통상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법률 성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우리는 수백가지에 이르는 비전략 항목의 동서무역에 대한 감시를 축소한다."


 빙빙 돌려서 말을 하기도 했지만, 요컨데 소련에 대한 수출을 촉진하고 싶다는 정부의 생각을 밝힌 것이다. 수출 규제를 풀게 되는 항목은 당초 채소와 시리얼 등의 식품 외에 금속 광물과 휘발유, 천연 가스와 그 파생 상품, 화학약품과 제품, 염료, 약품, 세제, 플라스틱 재료, 금속 제품과 공작기계, 과학용 전문 기구 등 400항목에 이르렀다.


 언뜻 별것 아닌 듯 보이는 항목이지만 전쟁에 사용할 수 있는 자재는 전부 들어 있었다. 게다가 다음에 추가된 항목은 더욱 놀랄 지경이다. 라이플 청소 세트와 전기기기, 레이더가 비전략 항목이 된 것이다. 이 전쟁에서 베트남이 사용한 전쟁 물자는 85%는 소련과 그 동맹국에서 온 것이었다.


 록펠러 가문의 미국에 대한 배신행위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베트남 전쟁 중에 록펠러 가문은 2억 달러를 들여 소련 국내 10여 곳에 다이아몬드 공장을 건설했다. 게다가 소비에트 최대의 트럭 공장을 건설하고 5,000만 달러의 비용으로 알루미늄 공장도 지었다. 물론 어떤 언론도 이런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베트남에서 전사한 5만 명의 미군 병사들은 록펠러 가문이 제공한 재료와 공작기계로 만든 총과 폭탄에 목숨을 잃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들이 태어난 나라의 일반 시민의 목숨을 벌레보다도 하찮게 여기는 초거부들의 잔학한 정신세계가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정신세계가 있기에 진주만 공격의 일시를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도 미국 태평양 함대에 알리지 않아 병사 2,345명과 민간인 57명을 희생시키고, 9.11 테러 때는 2,749명의 일반시민을 불태워 죽이는 참사를 계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죄의식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않고 태연하게 살고 있다.


  ◇ 소련 수뇌까지 움직이는 록펠러는 미국을 좀먹는 암세포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악의 근원인 것처럼 언론이 보도하던 공산주의 국가의 설립은 일루미나티 설립 이후 계속되어 온 세계 통일이라는 큰 강의 흐름과 닮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야망에 합류하는 지류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도 감히 그것을 음모라 부르지 않는다>에 이와 관련된 흥임로운 내용이 있다.


 "이상한 일이 1964년 10월에 발생했다. 체이스 맨해튼 은행장이자 외교문제평의회 의장이었던 데이비드 록펠러가 소련으로 휴가를 떠난 것이다. 당대 제일의 제국주의자가 휴가를 보낼 장소로는 참으로 기묘한 곳이었다.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데이비트 록펠러가 소련 국내에 소유한 재산을 몰수해 인민들에게 나눠 줄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록펠러가 크렘닌에서의 휴가를 마치고 2~3일 후,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흑해의 휴양지에서 소환되어 그의 부하에게 해임을 통보받았다. 참으로 이상한 사건이다. 세계인들에게 흐루시초프는 소비에트 정부의 절대적인 독재자로 알려져 있다.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소비에트연방을 움직이는 공산당의 정상에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독재자 지위에 있는 자를 해임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데이비드 록펠러는 한 종업원을 해고하기 위해 소련으로 여행을 갔던 것일까? 소련의 서기장이라는 지위가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권력의 얼굴 마담에 불과한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그 권력은 뉴욕에 있을지도.....(누구도 감히 그것을 음모라 부르지 않는다)


 이 사건을 보면 소련을 움직이던 인물은 바로 데이비드 록펠러였음이 명백해진다. 1962년 10월 15일에 시작된 이른바 쿠바위기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은 흐루시초프가 이끄는 공산 소련이 카스트로가 정권을 탈취한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면서 시작된다. 미국의 턱밑에 핵을 실은 미사일을 배치하려고 한것이다. 자칫하면 핵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에 전 세계가 긴장속에서 케네디의 대응을 지켜본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제국 소련의 이미지가 서방에 정착되어 미소의 냉전이 본격화되었다. 이것 역시 록펠러 가문이 시나리오를 쓴 연극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 '매카시즘'의 역사적 재조명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일으킨 이른바 '매카시즘'이 1950년에 시작되기 전까지 미국의 정부 내부, 특히 국무부에는 수많은 공산당 동조자들이 있었다. 그무렵 어둠의 세계 금융은, 소련 설립 후의 결과에 크게 만족하고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상을 이용해 미국을 서서히 내부부터 변화시키려 했다.


 미국 헌법의 정신은 개인의 인권을 중시하고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 한다.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인권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정부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 즉 양자는 극과 극의 관계라 할 수 있다. 권력을 쥐고 민중의 지배를 계획하는 사람들에게는 미국 헌법의 정신이 악이고 공산주의 제도가 선인 것이다.


 공산주의 국가 소련이 설립되고 2차대전 이 끝난 뒤 공산국가의 증가세를 보니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공산주의 국가의 세계 통일까지도 가능할 것 같았다. 2차대전 이후 소련의 세력 확대와 공산 중국의 출현은, 뉴욕과 런던에 있는 어둠의 세계 금융이 뒤에서 지원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 마수를 미국정부 내부에도 뻗치고 있었다. 1970년대 중엽에는 유엔 가맹국이 150개국이 채 되지 못했는데, 그 중 3분의 1에 가까운 43개국이 공산주의 국가였다. 더불어 페이비언 사회주의자인 노동당이 영국을 내부에서 서서히 변화시키고 있었다.


 소련과 미국, 중국이 공산당의 손에 움직여지게 된다면 전 세계가 공산당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 계획이 매카시 의원에게 발각되어 매카시즘이라는 미국역사에 남을 사건으로 발전한 것이다. 만약 매카시의원이 반공활동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미국 정부는 이미 예날에 공산당에 점령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1954년에는 어둠의 세계 금융이 한 텔레비전 사회자를 이용해 반격을 개시했다. 실의에 빠진 매카시는 3년 뒤인 1957년에 49세의 젊은 나이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들이 사용한 매카시 흔들기 작전은 시종일관 매카시 의원의 인신 공격에만 주력할 뿐, 매카시즘의 옳고 그름이나 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정부 내부에 있었는지 같은 중요한 문제에는 전혀 접근하지 않았다. 이 수법은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9.11테러의 진상을 폭로하려 하는 유명인이 나타나면 이 수법을 이용해 인신 공격으로 일관함으로써 그 인물의 사회적인 생명을 끊어 놓는다.


 역사가들 중에는 이 매카시즘을 시대가 낳은 광기 현상이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매카시즘은 자유의 나라 미국의 상징인 헌법을 존중하는 온건한 사고방식의 사람들이 그 시대에는 아직 건재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다. 어둠의 세계 금융의 흉계는 매카시의 목숨을 건 저항으로 반세기나 늦어졌다. 안타깝게도 9.11테러가 발생한지 한달 반 뒤 부시 정권이 미국 애국자법안을 만들면서 어둠의 세계 금융의 계획은 크게 전진했다.


 <누구도 감히 그것을 음모라 부르지 않는다>에는 공산주의를 통한 세계 통일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기술되어 있다. 서툴지만 그 부분을 번역해 봤다.


 "공산당 지지자들의 권력 조직이 '사회민주주의 공화국' 미국의 설립에 성공하면 다음 단계는 독재적인 세계 정부의 설립을 위한 모든 나라의 대동단결이 된다. 이것이 공산 중국을 유엔에 가입시킨 가장 큰 이유인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전 세계의 자연 자원과 교통, 무역, 금융업을 지배하려고 계획한다면 전 세계 나라를 한 지붕 아래 두는 편이 편리하다. 권력 조직 안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국제 정치 기구를 의미하는 말은 '신세계 질서'다. -중략-


 세계 정부는 언제나 공산주의자들의 목표였다. 1915년에 러시아 기관지 <사회민주주의> 제40호에서 레닌은 '세계의 연합 국가'를 제안했다. 1936년에 열린 국제 공산주의 대회(코민테른)의 프로그램에는, 세계적인 독재주의는 '다른 나라나 나라들의 모임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할 때만 확립된다'라고 적혀 있다.(누구도 감히 그것을 음모라 부르지 않는다)


 ◇ 독일과 일본을 폭주시켜라


 그 전해인 1935년의 코민테른 제7회에서 스탈린이 한 발언은 일본이 언급되어 있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사람도 많을 것으로 생각 되기에 위키피디아에서 발췌했다.


 "독일과 일본을 폭주시켜라! 그 칼끝이 조국 소련을 향하게 해서는 안 된다. 독일의 칼 끝은 프랑스와 영국을, 일본의 칼끝은 장제스의 중국을 향하게 하라. 전력이 소모된 독일과 일본 앞에 최종적으로 미국을 참전시켜라. 일본과 독일의 패배는 필연적이다. 그런 다음 황폐해진 일본과 독일 양국을 공산주의 진영에 집어넣는 것이다."


 실제로 스탈린은 종전 다음날인 16일에 구시로와 루모이를 연결하는 훗카이도의 북반부를 할양할 것을 미국 대통령 투루먼에게 요구했다. 일본으로서는 다행하게도 당시 주둔하고 있던 연합군 총사령관이 공산당을 크게 혐오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투루먼은 스탈린에게 거절의 답신을 보냈다. 맥아더가 공산당을 혀오하지 않았다면 일본은 현재와는 상당히 다른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록펠러 가문이 뒤에서 조종하는 공산당 지지자가 국무부에서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지만, 미국 헌법의 정신이 아직 살아있어 매카시 의원이 등장함으로써 미국 국내의 공산당 활동은 싹이 뽑히고 말았다. 1991년에 소련이 붕괴됨에 따라 공산주의가 실패했음이 판명되었기 때문에 장기간에 걸친 미국의 공산화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즉 1991년을 기점으로 신세계 질서의 세 부문 중 하나인 소련이 소멸된 것이다.


 '제왕' 데이비드 록펠러는 소련식 계획경제가 실패할 것임을 1970년대 중반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장의 마지막 항에서 소개 하겠지만, 데이비드의 지시로 덩샤오핑이 1978년에 중국의 방향 대전환을 제안하고 이번 금융 위기의 원인으로 알려진 서브프라임론을 조장하는 법률이 그 1년 전인 1977년에 미국의회에서 입법화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데이비드 록펠러가 소련을 통해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는 식의 세계 제패 방법을 포기함과 동시에 다른 방향에서 미국을 사회주의화할 계획을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소련과는 다른 수단으로 '사회민주주의 공화국' 미국을 설립하는 계획의 첫번째 단계가 미국을 뿌리부터 뒤흔든 이번 금융위기인 것이다. 소련식 계획경제의 파탄에서 교훈을 얻어 1979년에 사회시장주의로 방향을 전환한 중국은 데이비드 록펠러의 후원으로 급격히 경제력을 키우고 있다.


 1979년에 '제왕' 데이비드 록펠러는 키신저를 중국으로 보내 정식으로 국교를 회복했고, 2000년에는 하원을 통해 항구적인 최혜국 대우를 중국에 선사했다. 데이비드가 공산 중국을 어떻게 이용해 나갈지는 앞으로 중국이 어떻게 하는냐에 달려 있다. 농약이 들어간 식품이나 납이 들어간 애완견 사료, 도장에서 납이 검출된 유아용 장난감 등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많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동료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항상 문제가 되는 중국의 인권 탄압은 데이비드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계 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2권   기쿠카와 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