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도서/세계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

2권2장. 그들은 이렇게 미국을 지배해 왔다 3

생활건강 연구가 2019. 12. 27. 10:46


2권2장. 그들은 이렇게 미국을 지배해 왔다 3


  ※ 독후감


 세계 금융자본가들은 연방준비은행을 설립하는 동시에 이자를 징수할 방법도 만들었다. 미국은 세금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연방소득세는 단 1센트도 국미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연방준비은행에 이자를 갚고 있는데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한국이나 일본 등 사립 중앙은행을 가진 나라들은 비슷하리라 보여진다.


 세계 금융자본가들이 중앙은행을 장악하면, 원금과 이자가 고스란히 그들의 수중에 들어온다.  그들은 마음대로 국가 경제를 좌우하고 주가폭락 인플레션 등으로 일반서민들의 재산을 약탈해간다. 자본주이라는게 허울 좋은 자유민주주의지, 국가 위에 세계 조폭이 군림하는 금융노예 세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조폭 양대 우두머리중 하나인 록펠러 가문은 악랄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해왔다. 그중 하나가 금주법을 전세계에 시행하도록 하여 알콜엔진을 석유엔진으로 바꾸게 만들었다.(사실은 알콜엔진이 석유엔진보다 더 우수한 기계였다) 이렇게 석유 독점체제를 갖춘게 록펠러 가문의 약진하게 된 배경이다.  


생활건강연구가  생태농부


2권2장. 그들은 이렇게 미국을 지배해 왔다 3



  ◇ 국민을 위해 써야 할 소득세가 은행 이자로 사라진다


 모건 일당은 연방준비은행을 설립하는 동시에 정부에 빌려줄 돈의 이자를 징수할 방법도 생각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세금은 꾸준히 들어오므로 정부에 빌려준 돈의 이자를 세금으로 갚게 한 것이다. 그들은 연방준비은행의 설립과 동시에 내국 세입청인 IRS를 설립하고 이듬해부터 소득세 징수를 시작했다.


 물론 국민에게는 그 소득세가 이자를 갚는데 사용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국민들은 열심히 일해 번 돈의 절반 가까이를 매년 세금으로 내고 있지만, 원천징수당한 세금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연방 소득세는 단 1센트도 국민을 위한 정부 예산에 활동되지 않고 모두 연방준비은행에 이자를 갚는데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이 밝혀진 것은 오랜 시간이 흘러 레이건이 대통령이 된 뒤였다. 레이건이 실업가 피터 그레이스를 위원장으로 삼은 위원회에 명령해 세금의 사용처를 조사하기 전까지 누구도 몰랐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참고로 미국의 부채는 1901년부터 1910년까지 거의 변함없이 10달러를 유지했지만 1920년에는 갑자기 40억 달러로 증가했다. 이 숫자를 볼 때 1913년의 연방준비은행 설립 이후 부채가 급격히 증가했음은 확실하다. 이 숫자는 1960년에 2,840억 달러가 되었고, 1998년에는 5조, 5,000억 달러로 급상승했다. 다만 이 금액는 절대적인 액수로 보면 엄청나지만 규모로 따지면 미국 예산의 3배 정도다.


 한편 일본은 국가 부채가 미국의 부채만큼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그 규모는 예산의 10배나 된다. 그 대부분이 일본은행권 발행에 대한 정부의 빚이라고 생각되는데, 누군가 조사할 사람은 없는 것일까?


  ◇ 주가 폭락 사태 '검은 목요일'을 불러온 마진론


 활기로 가득찬 신흥국 미국이라는 무대와 자신들이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는 중앙은행이라는 도구가 갖춰졌다. 이 돈의 노예들은 폭리를 거두는 동시에 금융계와 경제계를 독점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리고 '검은 목요일'로 알려진 1929년 10월 24일의 주가 대폭락을 연출했다.


 이때 주가 폭락의 직접적인 원인은 '마진론'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대출에 있었다. 이것은 주식을 살 때 내야하는 금액의 10%를 적립하면 금융브로커가 나머지 90%의 금액을 빌려줌으로써 부담을 크게 덜어주는 대출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이용을 했다. 그 결과 주가는 5년 사이에 5배나 상승했다. 여기에는 함정이 있었다. 돈을 빌려준 쪽은 언제든지 자신이 원할 때 상환을 요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24시간 안에 돈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 그 '마진콜'이 24일 아침에 발동된 결과, 오전 11시에는 시장에 매도 주문이 쏟아졌다. 이때는 거대 중매상들이 협의해 지지 매수를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며칠은 버틸 수가 있었다. 다음 주 화요일이 되자 불안감을 느낀 투자자들이 주식을 팔기 시작했기 때문에 다시 폭락이 시작되었다. 이 두번째 폭락의 규모는 처음 폭락보다 더 컸다.


 이 주가 폭락의 영향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확산되어 세계 대공황이 발생했다. 공황이 정점에 이르던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세계 무역량이 70.8%나 감소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주가가 80%이상 하락했다. 공업 생산량은 평군적으로 3분의 1이 넘게 감소했다. 전체 노동자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200만 명에 이르는 실업자가 거리로 쏟아졌다.


 페쇠된 은행의 수는 1만 6,000개에 이르렀다. 1933년 3월에는 마침내 미국의 모든 은행이 3일간 영업을 중지하는 비상사태까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국제 금융자본가들은 도산한 작은 은행들을 헐값에 사들여 산하에 두며 덩치를 키웠다. 또 도산한 기업의 자산을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에 사들여서는 훗날 비싼 값에 팔았다.


  ◇ 록펠러 가문과 석유


 이제 드디어 어둠의 세계 금융의 또다른 축이자 미국을 대표하는 초 거부인 록펠러 가문이 등장한다. 초대 당주인 존디 록펠러의 비즈니스 방식을 몇 가지 소개하도록 하겠다.


 위키피디아에는 '무자비한 영업 전술'이라고 짧게 적혀 있는데, 알기 쉽게 말하면 악랄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것이다. 비즈니스에 재능이 있었던 그는 회계상에서 몸을 일으켜 자신이 세운 스텐더드 석유를 미국 석유 시장의 90%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성장시켰다. 


 석유는 고대부터 세계 곳곳에서 땅위로 분출되었다. 사람들은 여기에 불을 붙이면 잘 탄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딱히 어떤 용도로 사용해야 할지는 알지 못했다. 석유가 중요한 에너지 자원이 된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비교적 최근의 이야기다. 1855년에 예일대학 교수가 <석유를 사용한 램프>라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비로소 석유의 사용 방법이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에서 제일 처음 사업을 목적으로 석유를 체굴한 곳1859년의 펜실베니아주 타이터스빌이라는 마을이다. 처음에 석유의 사용처는 램프와 난로 밖에 없었다. 그 장래성에 일찌감치 주목한 존 디 록펠러는 당시 난립하던 동업자들을 악독한 방법으로 매수하고 쓰러트리며 사업 확대에 주력했다. 1880년대에 전 세계에서 사용되던 석유는 대부분 램프와 난로용이었다. 전부 미국산이었으며 그 중 90%가 스텐더드 석유의 제품일 정도로 그는 사업을 확장했다.


 이 무렵 석유의 이용 주체는 등유였다. 훗날 내연기관의 연료로 사용되는 휘발유는 등유를 뽑아낸 다음 남는 산업 폐기물로서 독특한 냄새가 나며 휘발해 폭발할 위험성이 높았기 때문에 록펠러는 한밤중에 몰래 강에 버리곤 했다. 그는 이 산업 폐기물의 사용 방법을 궁리하다 그 무렵 일반적이 되기 시작한 내연 기관의 연료로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휘발유를 엔진에 사용하면 엔진 내부가 지저분해지고 폐기 가스도 나오지만, 어차피 버릴 것이라는 생각에 매우 싼 값에 휘발유를 팔기 시작하자 사용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이 산업 폐기물의 재이용법을 생각해 낸 것이 바로 그의 약진의 비밀이었다.


  ◇ 석유 산업이 알코올 자동차를 없앴다


 현재 자동차의 연료로 사용되는 휘발유에는 10% 정도의 엔탄올이 섞여 있다. 자동차가 길거리를 달리기 시작한 19세기 말엽만 해도 자동차의 연료는 100% 알콜이었다. 이것도 정보 조작의 하나로 생각되는데, 알콜을 사용한 자동차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매우 적다. 위키피디아 영어판 포드 티형 항목을 찾아보면 "엔진은 휘발유와 에탄올 양쪽을 사용해 달릴 수 있었다."라고 짧게 적혀 있다. 그러나 어느 페이지를 뒤져 봐도 알콜엔진에 관한 기술은 전혀 없다.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 이르러서는 포드 티형 항목에서 알콜이라는 글자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자동차가 알콜과 휘발유를 모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려면 두 개의 간단한 장치만 있으면 된다. 명차라고 부르기엔 손색이 없는 포드 티형에 붙어 있었던 장치는 단 두 개 뿐이다. 알콜의 연소 온도가 휘발유보다 높기 때문에 스파크의 연소 타이밍을 빠르게 하기 위한 레버와 알콜 자체가 분자 구조에 산소를 포함하고 있어 엔진 속에서 연소될 때 휘발유만큼 산소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산소의 양을 조절하기 위한 초크, 이 두개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이 포드 티형은 컴퓨터 같은 것이 달려 있지 않아 가벼웠다고는 하지만 1갤런의 알콜로 34마일을 주행했다고 한다. 이는 컴퓨터로 연소제어를 하는 현재의 일본 소형차가 고속도로에서 30마일, 도시에서 20마일을 주행하는 것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연비다.(중략)


 자원이 유지와 자급자족을 목표로 한 농업 생태계의 개발을 연구소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쓴 대체 연료에 관한 서적에는 역사의 뒷무대로 사라져 버린 알콜과 자동차의 관계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저자는 요즘 표현을 사용하자면 친환경 농업의 일인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로, 식물의 잔해를 비료로 사용해 매우 효율적으로 알콜을 추출할 수 있는 식물을 키우는 방법을 고안해 미국 특허를 취득하기도 했다.


 그는 '알콜 연료에 관한 가장 종합적인 책'을 목표로 무려 25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집필을 한 끝에 이 책을 완성했다.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회사나 재단 등의 조직으로부터 단돈 1센트의 원조도 받지 않았기에 아무런 간섭없이 이 책을 쓸 수 있었다는 점을 매우 감사히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수많은 연구소와 조사 기관이 록펠러 재단이나 카네기 재단으로부터 자금 원조를 받고 있어 그들이 원하지 않는 조사 결과나 연구 결과를 발표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암시한다.


 연료용 알콜인 에탄올은 일반적으로 사탕수수나 옥수수로 만들지만, 기본적으로는 어떤 식물이나 곡물, 콩류에서도 추출할 수 있다. 이 책의 첫항에는 세계를 지배하려는 자들이 일반 시민들을 속이기 위해 언론을 통해 정보 조작을 한 결과 일반인들 사이에 형성된 '알콜은 대체 연료로서 휘발유보다 열등하다'라는 통념이 전혀 사실이 아님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 알콜 연료는 석유보다 우월하다


 알콜과 인류의 관계는 매우 역사가 깊다. 알콜을 만들기 위한 발효업이 인류의 두 번째로 오래된 직업이라고 할 정도로 옛날부터 인류는 알콜을 애용해 왔다. 다만 이 알콜을 마시기 위한 것으로, 연료로 사용하는 알콜과는 종류가 다르다. 곡물을 양조하면 만들어지는 것은 에틸알콜이다. 이것은 마실수 있으며 농도가 진하면 불이 붙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산업용, 공업용으로 사용하려면 에틸알콜에 메틸알콜을 5% 정도 첨가해 변성 알콜이라는 것을 만든다. 메틸알콜은 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마시면 실명하거나 중독사에 이를 우려가 있다. 따라서 마시는 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지만, 이 변성 알콜을 연료로 사용하면 엔진 속이 더러워지지 않는다. 배기가스로 물과 산소와 CO2만 나올 뿐 일산화탄소와 질소화합물은 배출되지 않는 것이다.


 또 옥탄가가 높으면 엔진 속에서 노킹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알콜의 옥탄가는 106으로 휘발유에 비해 매우 높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내연기관의 연료로는 알콜이 더 뛰어난 것이다. 그래서 헨리 포드는 알콜 엔진을 탑재한 자동차 개발에 몰두 했을 정도였다. 4행정 사이클 기관이 만들어진지 30년 정도가 지난 뒤부터 휘발유가 연료로 등장하면서 비로소 알콜과 휘발유 양쪽이 연료로 사용하게 되었지만, 그 전까지는 알콜이 주된 연료였다.


 참고로 옥탄가 100인 휘발유를 스탠더드 석유가 개발한 시기는 2차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있었다. 나치스 독일의 전투기가 성능이 뛰어났던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록펠러는 전쟁 중에 나치스에 옥탄가 100의 하이옥탄 휘발유를 공급했던 것이다.


 발매 초기에 록펠러는 자동차용 휘발유를 캔에 담아 가격을 크게 낮추고 등유의 판매 경로를 이용해 소매점에 팔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내로 들어왔을 땐 가솔린을 이용해지만, 어디까지나 주류는 어디에서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알콜이었다. 미국에서 최초로 주유소가 생긴 때는 1920년인데, 이것은 1919년에 금주법이 성립되어 알콜을 손에 넣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전까지는 교외로 나가면 얼마든지 알콜을 구할 수 있었기에 주유소가 필요 없었다.


 1906년에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변성 알콜의 세금을 없애고 동시에 위스키와 진의 가정용 양조기 사용 신청 절차를 간소화했다. 그 덕분에 교외로 나가면 어느 농가에나 양조기가 구비되어 있어 알콜을 구하는데는 조금도 어려움이 없었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포드가 농가용으로 제조한 트랙터의 초기 모델에는 알콜 엔진만이 사용되었다. 여담이지만, 위스키로 유명한 시그램사는 1970년대까지 회사 내에서 알콜 연료 트랙터를 사용했다.


  ◇ 금주법은 산업용 알콜을 못 쓰게 하기 위한 것


 어째든 이 처치 곤란한 산업 폐기물이었던 휘발유를 밝은 미래가 약속된 자동차의 연료로 널리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존 디 록펠러는 한 가지 계책을 꾸몄다. 그 계책이 성공하면서 휘발유만이 엔진의 연료로 사용되게 되었다. 만약 이 일이 없었다면 현재의 연료 문제는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바로 세기의 비상식적 법률로 불리는 금주법과 관련된 이야기다. 예수 그리스도도 마지막 만찬 때 식사와 함께 붉은 포도주를 마셨던 만큼, 알콜은 크리스트교에게 그다지 혐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구미에서 오래 전부터 금주 운동이 벌어졌던데는 술집에 가서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남편에 대한 불만으로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운동에 참여한 배경이 있다.


 한편, 이 무렵 크리스트교의 일파 중에 '악마의 럼주'를 죄악의 근원으로 여기고 알콜의 판매를 금지하는 운동을 열심히 펼치던 집단이 있었다. 존 디 록펠러는 침례교의 가르침을 평생 지켰는데, 이 때는 경건한 기독교인을 가장해 그들의 운동을 지원했다. 그는 당시 돈으로 400만 달러라는 거액의 운동자금을 마련해 먼저 주 의회에, 다음에는 연방 의회에 로비를 벌여 헌법을 개정하도록 했다.


 또 동시에 그는 록펠러 집안의 사람들을 반주점연맹을 비롯해 금주 운동을 펼치는 조직의 임원으로 보냈다. 반주점 연맹이라는 조직은 오하이오 주에서 1893년에 결성되었다. 2년 뒤에는 그전까지 활동하던 여성 기독교도 금주 연합이나 금주법당을 제치고 전국에서 가장 세력이 큰 금주운동 단체가 되었다. 이 무렵부터 록팰러의 금전적, 정치적 지원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여타 금주운동단체와는 다른 꿍꿍이 속이 있었을 것이다.


 헨리 포드는 음용 알콜만을 금지하고 산업용 알콜은 남겨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록펠러의 진짜 목적은 산업용 알콜의 제조를 금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교외의 농가에서는 자신들의 알콜을 제조할 수 있기 때문에 판매를 금지한다고 해도 연소용 알콜의 사용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제조 자체를 금지해야 한다고 록펠러는 판단했던 것이다.


 결국 큰 돈을 투입한 록펠러의 목적은 달성되었다. 그 결과 1919에는 모든 알콜의 제조와 판매를 금지하는 항목이 미국 헌법 18조에 포함되었다. 이 또한 록펠러가 장기적인 시야에서 계획을 세운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록펠러 가문은 미국 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에서도 동시에 금주법 제정을 시도했다. 그 결과 캐나다의 일부와 러시아,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핀란드 등 유럽 곳곳에서 금주법이 시행되었다.


 이 중 특히 흥미로운 곳은 러시아다. 제정 러시아가 쓰러지고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한 때는 1917년이다. 즉 레닌과 스탈린은 제정 시대에 시작된 금주법을 혁명 후 8년이나 유지한 셈이다. 물론 레닌이나 트로츠키 일당은 뒤에서 몰래 마음껏 퍼마셨겠지만, 현재도 평균수명이 여성 72세인데 반해 남성은 59세로 극단적인 짧은 이유가 보드카를 너무 많이 마시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로 보드카를 좋아하는 일반 러시아인들이 11년이나 군말 없이 정부의 지시에 따랐다니 놀랍기 그지 없다. 어쨌든 소련의 공산당 정권이 록페러 가문의 뜻대로 움직였다는 사실은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알콜의 제조와 판매가 금지된 뒤에는 여러분이 상상하는대로 석유를 지배하는 록펠러가문의 세상이 되었다. 즉 구미 여기저기에서 20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금주법의 시행은 휘발유를 팔기 위한 록펠러 가문의 음모였던 것이다. 이 또한 학교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 역사의 진실이다.


  ◇ 공기를 사용한 엔진이라는 획기적인 발명이 실용화 되다


 대체 엔진 이야기가 나온 김에 획기적인 엔진으로 주행하는 자동차를 소개하겠다. 휘발유 대신에 물을 사용하는 엔진의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있겠지만 공기를 사용하는 엔진은 나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 자동차는 압축 공기로 피스톤을 움직이기 때문에 배기가스 문제가 전혀 없다. 언뜻 간단해 보이는 구조지만 1.5유로(180엔)의 비용이면 되는 단시간의 압축공기 주입으로 200킬러미터를 주행할 수 있다. 최고 속도는 시속 110킬로미터나 된다. 독일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을 달리는데는 적합하지 않지만 시가지 주행에는 전혀 모자랄 것이 없는 성능이다.


 또 성능보다 더 놀라운 것은 저렴한 가격인데, 판매 가격이 3,500유로(700만원)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발병된 이 자동차는 독일 자동차 회사의 협력으로 제조 판매가 결정되어 가까운 미래에 판매가 개시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판매 지역이 유럽과 인도로 한정되어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다. 뉴스에 나온 영상만을 놓고 보자면 차체는 유럽형 디자인으로 꽤 괜찮은 수준이다.


  ◇ 페이비언주의 - 온건함으로 위장한 공산주의 사상


 앞에서 소개한 게리 앨런의 책 <신세계 질서에 '노'라고 말하라>에는 '신세계 질서의 3부문'이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문장이 있다. 여기에 따르면 어둠의 세계 금융이 신세계 질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는 세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 세 부문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한다. 


 하나는 급진적인 방법이며, 다른 두가지는 비교적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목적 달성을 위해 전진하고 있다. 이 세 부문은 바로 국제적인 거대 은행가들(국제 금융자본가)과 페이비언 사회주의자(점진적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이다. 많은 개인과 단체가 세 부분 중 하나에 속해 있는데, 개중에는 두개, 세개 부문에 발을 담그고 있는 예도 많이 알려져 있다.


 거대 은행가들이 영국을 총괄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 '왕립국제문제연구소'다. 그 사생아로서 록펠러 가문이 리더가 되어 미국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 '외교문제평의회'다. 유럽을 총괄하는 '빌더그룹'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지배하고 있다. 유럽을 지배하던 로스차일드 가문은 미국이 전 세계 정치와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안으로 쑥 들어가고 록펠러 가문에 실권을 넘겨준 듯한 느낌이 든다.


 특히 넬슨이 죽은 뒤에는 막내인 데이비드가 록펠러 가문의 실권을 쥐고 왕립국제문제연구소나 빌더버그 그룹과 상의하면서도 자신이 의장으로 있었던 외교문제평의회 회원들을 최대한 활용해 결국 '제왕'이라고 불리게 될 만큼의 지위를 쌓았다.


 위에 소개한 세 부문 중 하나인 페이비언 사회주의자의 중심은, 19세기 후반에 사회주의 사상을 지닌 영국의 지식인들이 창립한 페이비언 협회다.(중략) 현재 영국의 정권을 잡고 있는 노동당의 전신인 노동대표위원회의 설립에는 많은 페이비언 협회 회원이 관련되어 있다. 20세기 내내 노동당은 페이비언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협회는 온건한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인지, 이솝 우화의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로 상징되는 거북이를 로고 마크로 사용했을 정도다.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같은 사회주의자로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친근감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론 군사력을 사용한 그들의 잔학한 폭력 혁명을 싫어해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악동'이라고 부른다.


 페이비언 협회는 유명대학의 교수를 맴버로 맞이해 학생들에게 영향을 줬다. 이윽고 그 학생들이 자라서 교육자나 목사가 되고, 나아가 정부 조직이나 언론에도 침투시킨다는 장기적인 계획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20세기 초엽부터 노동당 당수와 총리가 된 사람 중 많은 수가 페이비언 협회의 회원이었다.


 최근 인물 중에는 전 총리인 토니 블레어와 현 총리인 고든 브라운이 회원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면 2008년의 금웅위기 때 브라운 총리가 은행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이라는 반 사회주의 국가체제로 이행하는 행동을 아무런 주저 없이 실행에 옮겨 전 세계 금융 관계자의 모범이 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페이비언 사회주의 운동은 제1차대전 이후 미국 국내에 깊은 영향을 줬다. 처음에 하버드 대학의 경제 부문에서 페이비언 사회주의를 도입했다. 그곳의 졸업자들이 미국 전역의 대학으로 퍼져 나간 것이다. 또 컬럼비아 대학의 교육 부문 학장이자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공언하며 1919년에는 도쿄국제대학에서 2개월간 강의를 하기도 했던 저명한 철학자 존 듀이는 페이비언 사회주의를 공공 교육의 시스템에 채용했다.


 페이비언주의자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설립될 때 보여준 볼셰비키의 잔학함에 대한 반동에서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미국인들에게 금구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교육 시스템을 '자유주의' 그리고 자신들을 '자유주의자'라고 불렀다. 이 위장된 명칭의 효과에 대해 합중국 사회당의 후보로 미국 대통령 선거에 여섯번 출마한 사회주의자 노먼 토머스가 잘 표현한 말이 있어 소개하겠다.


 "미국 국민은 사회주의인 줄 알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유주의'라는 이름이라면 그들은 사회주의의 여러 단편을 받아들일 것이다. 미국은 결국 그렇게 되었는지 깨닫기도 전에 어느날 사회주의 국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세계 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제2권  기쿠카와 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