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도서/세계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

2권2장. 그들은 이렇게 미국을 지배해 왔다 1

생활건강 연구가 2019. 12. 26. 05:30


2권2장. 그들은 이렇게 미국을 지배해 왔다 1

(록펠러 편)


 ※ 독후감


 미국의 건국과 민주주의의에 원주민 부족 연맹체가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중앙집권보다 지방자치 권한을 강화하고, 왕과 영주와 같은 권력자인 대통령을 국민의 공복으로 명시하여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민주국가를 건설했다.


밝은 미래를 약속한 미국의 발전을 기뻐하지 않은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로스차일드 가문'이었다. 그들은, 미국을 다시 영국의 식민지로 삼기 위해 사립 중앙은행 설립에 필사적이었다. 미국의 분열을 유도했지만 남북통일로 실패하자 대리인인 시프를 미국에 보냈으며, 그들의 하수인인 모건과 록펠러를 지원했다.


 모건의 주도하에 공황을 유도하여, 1913년에 '미연방준비은행'이라는 사립 중앙은행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에따라 미국은 다시 영국에 점령을 당한 것이다. 통화발행권은, 미국 의회와 사립 중앙은행 사이를 다섯번이나 오갔다. 제7대 대통령인 엔드르 잭슨은 중앙은행과 싸워 통화발행권을 되찾아 온 대통령으로 유명하다. 그후 77년동안은 사립 중앙은행이 미국에 발을 붙일수 없었다.


생활건강연구가  생태농부


2권2장. 그들은 이렇게 미국을 지배해 왔다 1

(록펠러 편)


  ◇ 미국 탄생과 건국 이념에 있는 '프리메이슨' 사상


 2008년 일어난 금융 위기와 석유가격 조작 등을 포함해, 현재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려면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하는 과정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미국의 독립에 프리메이슨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미국의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60명 중에 41명은 프리메이슨으로 알려져 있다. 조지 워싱턴, 제임스 매디슨을 비롯해 역대 대통령 중에도 프리메이슨 멤버가 많다.


 프리메이슨이라는 조직은 1360년대에 석조교회 건축을 담당하는 석공들의 모임으로 영국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현재도 전 세계에 네트워크를 유지하며 활동하고 있다. 회원의 이름이 공개되지 않고 자세한 활동 내용도 비밀이기 때문에 뜬 소문들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기원의 경위로 볼 때, 회원끼리 특히 계급의 위아래를 막론한 친목 단체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된다.


 미국에서는 독립 전쟁 당시 미국 원주민 부족 중에 프리메이슨 멤버가 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중세의 템플 기사단과의 관계를 비롯해 서양사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데, 여기에서는 미국 독립에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추적해 나가고자 한다.


 동시다발 테러가 일어난 2001년 이후 반미, 혐미의 움직임이 일본과 이스라엘을 제외한 세계의 주류가 되고 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1776년에 건국한 이래 '자유의 나라 미국'으로서 200년 넘는 오랜 시간 동안 세계인의 동경의 대상이었으며 대량의 이민자들이 몰려들던 나라였다. 그 이유는 건국이념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독립을 했을 무렵 세계는 왕후와 귀족의 정점에 서 있는 봉건사회였다. 지금에야 인권이란 말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이 시절에 일반 민중의 기본적인 인권의 중요성을 헌법에 높이 내건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국가를 움직이는 영주와 같은 대통령이 국민에게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드러내며 건국되었으니, 무거운 세금과 영주의 폭정에 시달리던 유럽의 일반 시민들이 앞 다투어 이민을 오기 시작했다. 사실은, 그 무렵에 미국 대륙으로 이민을 결심한 사람들은 대부분 인권이라는 말의 이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보다는 자신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징수해 호화롭게 사는 왕후와 귀족이 없는 나라라는, 당시로서는 일반적으로 믿기 어려운 나라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 이민을 결정한 커다란 동기였으리라.


 미국의 이러한 근대 민주주의 제도의 기원그리스의 도시 국가인 아테네 시절부터 유럽에 뿌리깊게 남아 있던 사상이 결집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또 16세기 영국의 대철학자인 프랜시스 베이컨이 쓴 유토피아 이야기인 <새로운 아틀란티스>에 쓰여 있는 생각이 투영되었다는 설도 있다.


 2,500년 전의 제도가 어느날 갑자기 더욱 진보된 형태로 현실화되어 근대적인 민주주의 국가 성립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는 의미다. 건국의 아버지가 당시 뉴욕 주 북부에 살던 미국 원주민 부족들의 통치 형태를 참고로 삼았다는 사실이 있는 것이다.


  ◇ 미국 민주주의에 영향을 준 이로쿼이 연맹


 뉴욕주와 캐나다의 국경부근, 모호크강이 허드슨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곳에서 온타리오호수 남쪽 지역에 싸움으로 세월을 보내던 여섯 개의 미국 원주민 부족이 있었다. 그들이 평화와 인권 존중을 위해 이로쿼이 연맹을 결성한 때는 1714년이었다. 이 연맹체는 그 후 지금까지도 엄연히 존재하며 기능하고 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일부 국가느 이로쿼이를 국가로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어느 한 부족은 자치 의식이 강해 자신들의 여권을 발행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들이 하나의 국가라는 의식을 품고 있는 것이다. 같은 형태의 평화연맹이 이 지역에 제일 처음 나타난 시기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여러 학설이 있는데 1142년부터 1450년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콜럼버스가 미국에 도착하기 42년 전인 1450년에 틀림없이 존재했다는 것만큼은 학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굳어져 있다.


 신세계에서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미국 원주민들이 벤저민 프랭클린이나 토머스 제퍼슨 같은 사람들이 새 국가 건설의 모델로 삼은 연맹체를 미국이 독립하기 300년도 더 전에 형성했다고 하니 실로 놀랍기 그지없는 사실이다. 이 이로쿼이 연맹의 특징은 동맹의 우두머리를 공복으로 생각하고 그가 잘못된 행위를 하면 해임한다는 규정을 만든 것이다.


 정치나 종교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고, 개인의 집에 허가 없이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며, 여성의 정치 참여를 인정하고, 비교적 평등한 부의 분배를 규정했다. 일반 시민이 행정부의 우두머리를 해임할 권리를 가지며 가족의 존재권을 소중히 여기고 여성의 권리도 인정한 것이다. 어둠의 세계 금융이 추진하고 있는 국가 체제와는 대조적인 체제라 할 수 있다.


 각 주의 권한을 소중히 여기는 미국 헌법의 기본 정신은 여기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 헌법은 각 부족을 존중한다는 이로쿼이 연맹의 사고방식에서 영향을 받아 연방정부를 결국 악한 존재로 간주한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영국의 군주제'에서 볼 수 있는 중앙 정부에 그다지 좋은 감정을 품지 않았다. 전체를 아우르는 시스템이 없으면 13개 식민지 정부의 연합체가 혼란 상태에 빠진다는 사실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헌법을 바탕에 둔 공화제를 채용하고 중앙 정부에는 제한된 권위만을 부여한 것이다. 그들은 민중이 노동의 대가로 얻은 결실을 정부가 가로채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미국의 연방 정부는 헌법상으로 많은 제한을 받았다.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 미국 원주민 연맹체의 존재와 정치체계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가 발행한 신문에 실어 식민지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소개했다.


 1736년에는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 열린 협정평의회의 자세한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 출판할 정도로 원주민과의 협정에 푹 빠져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프랭클린이 이로쿼이 연맹의 시스템을 자신이 수장의 지위에 있었던 프리메이슨 모임의 회원들에게 열심히 침투시키는 모습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 이로쿼이 수장 조언이 미국 독립의 바탕이 되다


 1744년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에 메릴랜드 주, 버지니아 주, 펜실베이니아 주의 대표가 모였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이로쿼이 연맹의 수장과 함께 당시 신대륙으로 침입해 오던 프랑스의 위협에 공동보조를 맞추는 방안을 논의하고 우호 동맹을 결성했다. 이 회의 기간 중에 원주민과 백인 모두가 존경하던 당시 60세의 카나사테고라는 이로쿼이 연맹의 대표자는 원주민들이 수 세기 전에 이루었듯이 식민지가 서로 단결하도록 미국의 13개 식민지 정부 대표자를 앞에 두고 이런 연설을 했다.


 "우리의 선조는 다섯 부족 사이에 단결과 우호를 확립했소. 이것이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었다오. 이것은 우리에게 이웃 부족에 대한 커다란 영향력과 권위를 보여줬소. 우리는 매우 힘있는 연합체요. 우리의 현명한 선조가 선택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을 준수한다면 당신들은 매우 강한 힘과 권력을 얻을 것이오. 그러면 당신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분열되지 않을 것이오."


 카나사테코가 제안한 식민지끼리의 단결이 실제로 실현되어 이로쿼이 연맹과 협정을 맺고 프랑스와 싸우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1754년이었다. 7월 4일은 1776년에 영국의 13개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한 미국 독립 기념일로 유명한데, 그것은 이날이 의미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카나사테고가 위의 연설을 한 날이 바로 7월 4일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봐도 이로쿼이 연맹이 얼마나 미국의 독립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존슨 대통령 시절까지 미국의 대통령은 취임할 때 이로쿼이 연맹이 시작된 땅을 방문하는 전통이 있었다. 아버지 부시가 대통령이던 1990년 8월에 11월을 미국 원주민 문화의 달로 결정하면서 한 연설의 일부를 소개하겠다.


 "향후 활동은 미국 헌법의 기초가 이로쿼이 연맹 정부에서 유래되었음을 비롯해 과거 5세기에 걸쳐 미국 원주민이 이 나라에 얼마나 공헌을 해 왔는지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입니다."(아버지 부시의 연설)


 이렇게 보면 미국의 건국에 이로쿼이 연맹이 깊이 관련되었음은 명확하다. 이 사실이 역사책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로쿼이 연맹이 독립전쟁 당시 미국의 적인 영국의 편에 가담한 것과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무엇이든 자신들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백인들에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일까?


  ◇ 미국에서 암약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대리인 시프


 이 신대륙에 500년 이상 전부터 존재했고 원주민들이 면면히 계승해온 훌륭한 지혜를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이어받아 완성시킨 나라가 바로 세계 최초의 근대 민주주의 국가 미국이다. 건국 이후 밝은 미래를 꿈꾸며 노동 의욕에 불타건 수많은 사람들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민해 왔다. 본국 영국도 처음에는 신생 미국에 대해 느슨한 식민지 정책을 채용했기 때문에 이 나라의 경제는 점점 발전을 거듭했다.


 이 훌륭한 제도를 바탕으로 밝은 미래를 약속 받은 신대륙의 발전을 기뻐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미국이 건국된지 100년이 지날 무렵, 유럽의 금융계를 좌지우지하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장래에 발전이 예상되는 신흥국가 미국을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기 위해 몇 번이나 의회에 접근해 중앙은행의 설립을 시도했다.


 잠시 성공하기는 했어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미국의 분열을 노리고 남북전쟁을 유도한 것인데, 이번에도 자신들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다. 그들은 드디어 이 발전을 약속 받은 신흥 국가 미국을 접수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손을 쓰기 시작했다.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게토에서 로스차일드 가문과 같은 집에 살던 18세의 젊은이 야코프 시프를1865년에 미국으로 보낸 것이다.


 그 후 신대륙 미국에서 활동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주 대변인은 유럽에서 구매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일본의 러일 전쟁 전비 조달용 국채를 다타하시 고레키요로부터 사들인 야코프 시프와 훗날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 굴지의 사업가가 되는 제이피 모건이었다.


 남북전쟁 당시 모건은 구식총을 군대로부터 한정당 3.5달러에 사들여 그것을 손질해서는 다시 군에 22달러에 납품하는, 훗날의 모습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비즈니스에 손을 대기도 했다. 은행가였던 아버지 영향으로 금융계에 들어간 그는 광대한 신대륙 미국을 개발하던 철강 회사와 철도 회사를 비롯해 수많은 기업에 융자를 해 줬다. 나중에는 스스로 실업계에 진출해 모건 콘체른을 구축했다.


 그는 아버지가 일하던 런던의 같은 은행에서 은행 업무를 배우기 위해 1857년에 영국으로 건너가 1년 동안 머물렀다. 그 무렵에 로스차일드와 알게 되었다.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로스차일드 가문으로부터 빌린 자본금을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모건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빌려줬는지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은 그가 죽었을 때였다. 미국 최고라고 일컬어지던 거대한 모건 재벌의 재산 중 19%만이 그의 명의이고 나머지는 모두 로스차일드와 관련된 사람들의 명의였던 것이다.


 훗날 로스차일드와 손을 잡고 어둠의 세계 금융의 정점에 군림하게 되는 록펠러 가문의 초대 당주 존 디. 록펠러도 모건으로부터 융자를 받아 커진다. 1865년은 작은 정유회사를 막 매수하며 힘차게 날개짓을 하려는 찰라였다.


  ◇ 로스차일드 가문의 미국 점령극


  이 로스차일드 가문의 대리인들이 미국을 차지한 수법을 지금부터 소개하겠다.


 미국의 운명을 바꿔 다시 영국의 식민지로 삼기 위해 그들이 필요했던 것은 단 하나, 바로 중앙은행의 설립이었다. 이 악마의 제도가 설립되기 전까지 거짓과 기만으로 일관한 그들의 태도는 이번 금융 위기 당시 그린스펀이 보여준 태도와 공통되는 바가 있다. 앞에서 소개한 <누구도 감히 그것을 음모라 부르지 않는다>의 내용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중앙은행 설립에 필사적이었다. 그들의 계획을 분쇄한 것은 바로 미국 헌법이 중시하는 '개인과 국가는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최대한 번영하며 행복해질 수 있다.'라는 사고 방식이었다. 금융 위기가 표면화 된 뒤 "연방준비은행이 월스트리트의 행동을 규제했다면 이렇게까지 사태가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전 연방준비은행의 의장인 앨런 그린스펀이 주장한 '자유 시장의 최선'이라는 사상은 원래 미국 헌법에서 나온 것이다.


 이 '규제 없는 자유시장'이라는, 헌법에 나와 있으며 미국 약진의 원동력이 된 생각을 그린스펀이 사임 전에 들고 나왔기 때문에 아무도 반론하지 못했던 것이다. 국민에게 침투한 이 '자유시장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바꾸고 중앙은행은 필요한 조직이라고 국민들을 세뇌시키기 위해 그들은  어떤 사건을 계획한다. 이 사건의 중심 인물이 바로 제이피 모건이었다.


  ◇ 모건 상회가 1907년의 금융 공황을 부추겼다


 19세기 말에 모건 상회는 이미 수많은 사업에 투자할 뿐만 아니라 직접 사업에 진출하고 있었다. 20세기 초엽이 되자 모건은 미국의 정계와 금융계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1907년 10월, 구리 광산회사의 주가 상승을 노린 회사의 내분과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그 중 한쪽 그룹에 융자를 하고 있었던 곳이 뉴욕 제3위 은행이었던 니커보커 신탁은행이었는데, 모건은 "이 은행이 위험하다"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그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국으로 퍼졌다. 소문을 들은 일반인들까지 공황에 빠져 예금을 인출하러 달려갔다.


 그 결과 이 은행을 비롯해 전국에서 수많은 은행과 기업이 도산했고, 주가는 전년도 최고치의 50%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와 관련해 1949년 4월 25일자 <라이프>지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1907년의 금융 공황은 모건이 일으켰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한 역사가의 대답이다.


 의회 조사 위원회에서 신탁은행의 행장이 증언한 "융자한 금액이 얼마 되지 않아 도움 따위는 필요 없었다"라는 내용이나 직접적인 증거, 그 후 어음 교환소에서 취한 벌칙 조치를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납니다.

 모건은 1907년 가을의 불안정한 주식 시장의 상황을 이용하고 그것이 더욱 악화되도록 유도해 금융 공황을 촉진시켰습니다. 그 결과 경쟁 상대를 몰락시킴으로써 금융 업계에서 모건 그룹의 우월성을 공고히 한 것입니다.


 그가 한 회사의 내부에서 벌어진 분쟁을 교묘하게 이용해 만들어낸 '금융공황'은 수많은 일반국민을 희생물로 삼았다. 이 사건은 어디까지나 중앙은행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서막에 불과했다. 계획의 최종단계로 그는 시기를 잘 포착해 "금융업계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라는 명목으로 거액을 내놓으며 다른 동업자에게도 협력을 요청했다. 이에따라 사람들은 안심을 했고 공황은 진정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공적 자금 투입과 같은 효과를 낸 것이다. 그의 이러한 행위가 없었다면 공황이 더욱 심각해졌을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실제로 모건이 한 행동은 이른바 '병주고 약주기'였다. 자신이 불을 지르고 스스로 끈 것이다. 어쨌든 이때 점수를 벌어 놓은 모건은 이와 같은 사태가 다시 일어났을 때를 대비해 일반 은행이 돈을 빌릴 수 있는 조직, 즉 은행의 은행인 중앙은행을 설립해야 한다고 여론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이 중앙은행이 시중에 유통되는 통화량을 조절하게 하면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피할 수 없는 호경기와 불경기의 급격한 격차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08년 가을의 금융위기 당시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한 유럽 각국이 제일 처음 한 행동이 사람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한 것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일반 사람들이 은행에 예금을 인츨하기 위해 일제히 몰려드는 사태가 얼마나 쉽게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일본에 있다. 일본 근대사에서 쇼와 금융공황이라고 알려진 이 사건은 간토 대지진 후에 지진 공황이라고 불르는 불경기가 계속되던 1926년에 발생했다.


 그 원인은 "도쿄 와타나베 은행이 파산했다"라는 당시 대장성 장관 가타오카 나오하루의 실언이었다. '국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뉴스가 전국에 보도되자마자 순식간에 전국의 은행에서 예금인출 소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 금융 위기는 아무리 컴퓨터가 발달한 21세기라 해도 사람의 심리는 돈과 관련된 문제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줬다. 


 미국 정부의 수뇌가 국회를 설득하고 전 세계의 정부가 정신없이 대책 마련에 몰두한 이유는 단 하나, 오로지 사람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있는 자들이 동요하기 쉬운 인간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한 것이 이번 금융위기였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 내용은 4장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 공황 저지를 구실로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주장한 사기꾼 


 이제 드디어 중앙은행 설립을 위한 단계로 넘어간다. 유럽에 기반을 두고 부의 축적에 전념한 로스차일드도 세계 통일이라는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신흥국가 미국이 지닌 장래성이 걸림돌이 될 것임을 명확히 인식했다. 남북통일이라는 형태로 남북 전쟁이 1865년에 종결되면서 미국을 분단시키는데 실패하자 로스차일드는 드디어 본격적으로 미국 공략에 나선다.


 영국을 비롯해 유럽 국가에서는, 자신들이 소유한 은행이 국왕으로부터 통화 발행에 관한 특허장을 받아 폭리를 거둬들이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의 독립 초기부터 자신들에게 이익을 안겨 줄 중앙은행을 설립하려 시도했다. 군주제 국가에서는 국왕 한사람만 구워삶으면 어떤 이권도 거의 원하는대로 손에 넣을 수 있다. 군주가 없는 공화제 국가에서는 민중과 의회를 설득해야 하기 때문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미국에서 많은 고생을 한다.


 1913년에 설립된 연방준비은행제도이사회는 제1합중국은행과 제2합중국은행에 이은 세번째 민간중앙은행이다. 독립 이래 모두 다섯번에 걸쳐 통화 발행권이 정부와 은행 사이를 오갔다. 1913년에 연방준비은행이 설립되면서 로스차일드 일당이 거의 완전히 수중에 넣은 통화발행권을 다시 되찾으려는 움직임은 현 시점에서 전혀 없다. 정부가 통화발행권을 빼앗긴지 벌써 100년 가까이 흐른 것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그 무렵 유럽의 왕후와 귀족이 로스차일트 가문의 뜻대로 조종당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그 폐해가 신생국가 미국에 미치지 않도록 했다. 독립 후 10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완성된 헌법에 의회만이 통화발행권을 가진다고 명시한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자신들의 입김이 닿은 의원들을 이용해 몇 번이나 중앙은행 설립을 시도했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남긴 유산 덕분에 미국은 오랫동안 로스차일드 가문의 착취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은 그가 취임했을 때 이미 기능하고 있던 중앙은행과 싸워 폐지시키는데 성공하고 그 뿌리를 철저히 뽑아냈다. 덕분에 그 후 7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미국에는 중앙은행이 존재하지 않았다.


 신흥 국가 미국의 경제는 항상 순조롭게 발전해 왔다. 왕후와 귀족이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이민자들의 활약이 19세기 후반에 미국이 세계 열강의 한 축이 될 수 있었던 커다란 요인이었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1913년까지 중앙은행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도 크게 공헌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재의 금융 시스템에서는 중앙은행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미국 경제가 1913년까지 중앙은행 없이도 순조롭게 발전해 왔음을 생각하면 중앙은행이 경제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은 금융에 문외한인 나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투자가인 짐 로저스도 같은 의견인 듯하다. 조지 소로스와 손을 잡고 퀀텀 펀드를 성공시킨 유명한 투자가인 그는 베어스턴스가 파산한 직후인 2008년 3월에 이미 연방준비은행의 폐지를 주장했다. 금융위기 뒤에는 "만약 지금 당신이 연방준비은행의 의장이라면 이 금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연방준비은행을 즉각 해체하고 의장을 사임할 것이다"라는 멋진 대답을 했다.


 금융전문가 중에도 연방준비은행을 불필요한 존재로 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마음 든든하다. 이미 현재의 금융 시스템은 중앙은행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적어도 일부 사람들의 축제에 이용되는 사기업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경제를 염두에 둔 관영 기업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세계 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2권  기쿠카와 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