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도서/세계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

2권2장. 그들은 이렇게 미국을 지배해 왔다 2

생활건강 연구가 2019. 12. 27. 07:00


2권2장. 그들은 이렇게 미국을 지배해 왔다 2


  ※ 독후감


 미국에 사립 중앙은행을 설립하기 위해 국제 금융세력은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대통령 선거를 이용해 모건의 꼭두각시인 윌슨을 당선시키고 1913년도에 중앙은행을 입법화 시켰다. 이 과정에서 금융자본가들은 수많은 거짓과 조작으로 미국 국민을 속였다. 윌슨도 나중엔 미국이 금융자본가들에게 지배되었다고 말하면서 중앙은행 입법에 서명한 것을 후회했다.


현재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은행은 입법, 사법, 행정의 치외법권지역이다. FRB의장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은, 국민을 속이기 위한 기만일뿐 실제는 록펠러 가문이 임명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국가의 통화 발행권을 되찾아오려 노력했던 대통령이 케네디였다. 그가 백주대로에서 암살을 당한 이유는 통화발행권이라는 금기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이 설립된 것은 미국이 다시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미국인들이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데 있다.


생활건강연구가  생태농부


2권2장. 그들은 이렇게 미국을 지배해 왔다 2



  ◇ 은행가 워버그와 상원의원 올드리치의 암약


 미국의 발전에 로스차일드는 위기를 느꼈다. 당시 <런던 타임스>에는 이러한 그들의 솔직한 심정이 그대로 적혀 있다.


 "만약 북아메리카에서 발생한 이 유해한 금융 정책이 지속된다면 그 정부는 전혀 비용이 들지 않는 자신들의 돈을 마련하게 된다. 그 정부는 부채를 갚아 빚을 없앨 것이다. 경제를 운용해 나가는데 필요한 만큼의 통화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역사상 전례가 없는 국가의 번영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또 우수한 두뇌와 모든 국가의 부가 북아메리카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이런 나라는 파멸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와 같은 풍조가 지구상의 모든 군주 제도를 파멸시킬 것이다.(런던 타임스)"


 이러한 생각이 그 후에도 지속된 결과가 미합중국의 실질적인 식민지화로 결실을 맺어 21세기인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중앙은행 설립에 대해 그들이 사용한 책략은 다음과 같다. 책략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은 폴 위버그다. 그는 1902년에 동생인 필립스와 함께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큰형인 막스가 아버지가 남긴 회사를 이어받아 운영했다. 훗날 나치스의 약진에 크게 공헌한다.


 폴과 필립스는 모두 당시 미국의 금융계에 큰 영향력이 있었던 사람들의 딸과 결혼했다. 두사람 모두 미국에서 가장 크고 국제적인 은행이었던 쿤 로브 상회의 파트너가 된다. 참고로 이 회사는 1977년에 리먼브라더스에 흡수될 때까지 존속했다. 공황이 발생한 1907년 이후 폴은 오로지 은행제도개혁에 관한 저작과 강연활동에 온 힘을 쏟기 시작했다. 이때 폴 위버그와 함께 은행 개혁론을 추진한 인물이 바로 '의회의 모건 브로커'로 알려져 있던 공화당 소곡의 상원의원 넬슨 올드리치였다. 


 참고로 올드리치의 딸 애비는 록펠러 가문의 제2대 당주와 결혼한다. 이 두 사람은 다섯 아들을 낳았다. 그중 둘째가 훗날 뉴욕 주지사를 거쳐 닉슨 실각 후 그 뒤를 위은 제럴드 포드 정권의 부통령이 된 넬슨 록펠러다. 또 넷째인 원스럽은 아칸소 주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주지사가 되었다. 다섯째인 데이비드는 '제왕'이라고 불리며 현재 미국, 나아가서는 세계를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 


  ◇ 지킬 섬 비밀회의에서 FRB설립 구상이 구체화되다


 1907년의 공황 이후 올드리치는 상원 전국 통화 위원회의 의장에 임명되었다. 국비로 2년 동안 유럽 시찰 여행을 다녀온 뒤, 1910년 11월에 워버그와 함께 비밀모임을 열었다. 물론 학교에서는 이 중요한 회의에 대해 절대 가르쳐 주지 않지만....


 조지아 주에는 제이피 모건 소유의 지킬 섬이 있다. 당시 금융계의 실력자 7명이 그곳에 있는 클럽 하우스에 모여 전국 통화위원회에 제출할 최종 보고서의 내용을 9일간에 걸쳐 협의 했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전 세계에 설립할 중앙은행의 모델이 될 궁극의 중앙은행을 설립한다는데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위버그는 명칭에 절대 '중앙은행'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 표면적으로는 의회가 주도하는 듯이 보이기 위해 시스템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중앙은행 알레르기'가 남아 있는 일반 국민들에게 사립 중앙은행이 아님을 어필하기 위한 위장 수단이었다


 여기서 그들이 결정한 내용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뉜다.


 1. 국민들을 속여 은행 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한다.

 제이피 모건이 고의로 일으킨 1907년의 공황은 중앙은행이 있었다면 막을 수 있었다고 국민에게 거짓말을 했다.


 2. 링컨의 그린백(링컨이 실시한 정부 발행 지폐)과 같은 사태가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한다.


 법률을 제정해 정부가 독자적으로 지폐를 발행하지 못하게 했다. 헌법 제1조 8항을 보면 의회가 통화발행권을 가진다고 나와 있기 때문에 중앙은행의 통화발행은 명백한 헌법 위반이다. 의원 중에는 그 위법성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언론이 다뤄주지 않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그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


 케네디가 1963년 6월 4일에 서명해 입법화한 대통령 행정 명령 제11110호는 재무성에 은 태환 지폐 발행권을 줬다. 그 결과 정부가 가지고 있던 40억 달러 상당의 은을 바탕으로(중략) 지폐와 1달러 은화가 인쇄, 제조되어 시중에 풀렸다. 지폐는 주로 2달러와 5달러가 유통되었다. 케네디 사후 이 지폐와 은화들은 인쇄되어 발행하기 직전이었던 10달러와 20달러 지폐와 함께 즉시 회수되기 시작해 폐기 처분되었다.


 케네디 암살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고 하지만, 통화 발행권이라는 금기를 건드린 것이 가장 큰 이유로 생각된다. 백주대로에서 벌어진 이 암살 사건은 정치가들에게 강력한 경고가 됐을 것이다. 케네디가 암살되기 전에는 많은 의원과 대통령이 방해를 받으면서도 통화 발행권을 되찾으려 시도했지만 현재 연방준비은행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용기 있는 의원은 오직 한명, 론 폴 공화당 하원의원 밖에 없다는 사실만 봐도 이는 명백하다.


 3. 각각의 은행에 시중에 유통되는 통화의 90%를 창조할 권리를 준다.


 중앙은행이 없던 시대에는 시중 은행이 은행권을 발행했다. 그렇기 때문에 시중의 중소은행도 중앙은행 설립에 크게 반대해 왔다. 그래서 통화 발행권은 연방준비은행만이 가지지만 이를 대신할 특권을 시중 은행에 줬다. 획득한 예금 총액의 90%까지 시중 은행이 대출의 형태로 빌려줄 수 있게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신용창조라고 부르는 은행만이 할 수 있는 사기적인 행위가 법제화되었다.


 4. 미국의 통화 공급량을 조절하는 조직을 소수의 사람들의 손에 맡긴다.


 일본은행 주식이 55%는 일본정부가 소유하고 있다. 한편 FRB는 조금 사정이 달라서 정부의 자본은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 12곳에 퍼져 있는 연방준비은행은 총괄하는 지역에 있는 멤버 상업은행이 자신의 자본금과 예금 보유액을 합친 금액의 6%에 상당하는 연방준비은행 주식을 보유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것이 전체의 몇 %에 상당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게다가 주주로서 발언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그 밖에 어떤 주주가 있는지도 공표되어 있지 않다. 주주 배당은 2005년 시점에서 연 6%다. 참고로 2004년 현재 미국에는 약 7,700개의 상업 은행이 있는데, 연방준비은행으 멤버가 된 곳은 약 2,900개다.


 12곳에 있는 연방준비은행의 리더적인 존재는 뉴욕 연방준비은행이다. 이곳의 주주는 10개사로 구성되어 있음이 판명되었다. 그 중 6개는 유럽에 있는 로스차일드 계열의 은행이다. 미국측의 은행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대리인인 쿤로브 상회, 골드만삭스, 리먼브라더스, 체이스 은행이다. 정리하자면 4개의 그룹이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에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3개로 줄어들었다.


 5. 중앙은행을 행정, 입법, 사법의 간섭을 받지 않는 완전한 독립기관으로 만든다.


 1913년에 만들어진 법률에는 의회가 연방준비제도이사회를 감독하는 것처럼 쓰여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모습일 뿐이다. 연방준비은행은 1914년 9월 13일에 델라웨어 주에서 비영리 기업으로 등기되었지만 통상적인 회사의 규칙은 적용받지 않는다. 정부의 활동을 감시하는 연방회계감사원이 1년에 한 번씩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준비은행을 조사하지만 회계만은 건드리지 않는다.


 원래 의회에 회계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정해져 있지만 아직 실행된 적은 없다.


  ◇ 일본은행 독립의 무서움, 치외법권의 탄생


 1998년 일본은행 개정법에 따라 일본은행은 정부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고 정책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근본을 따지자면 지킬섬 회의의 방침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1년의 중앙성청 개혁으로 일본은행의 숙적이었던 대장성이 해체되었기 때문에 일본은행은 완전히 독립된 존재가 되었다. 


 10월 6일자 영국 <타임스>지에서 한 논설위원은 자신의 서명이 담긴 기사에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의 원인이 된 1989~1994년의 미에노 야스시 총재는 멍청했던 것도 아니고 당시 인기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무능력과 판단미스는 훗날의 결과론에 불과했다."라고 썼다.미에노 야스시가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지시를 받고 거품의 발생과 붕괴를 의도적으로 일으켰다는 것을 <타임스>는 간파하지 못한 듯하다.


 대장성이 있었을 때조차 1억 3,000만명의 일본인을 10년이나 고통에 빠트린 일본은행이 앞으로 뉴욕에 있는 보스의 지령에 따라 일본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어도 이제는 아무도 일본은행에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이다. 일단 임명된 총재는 범죄를 저질러 유죄를 선고 받거나 자신이 직접 사임하지 않는 한 누구도 교체할 수 없다.


 또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은 물론이고 일본은행도 정부와 국민에게 어떤 설명도 할 의무가 없다. 요구를 받으면 무난한 수준의 설명은 하지만 정작 중요한 내용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그 좋은 예가 최근에 있었다. 비즈니스 뉴스 분야에서 정평이 나 있는 블룸버그 통신이 이번에 실시한 2조 달러가 넘는 긴급 융자의 대상과 담보를 밝혀 달라고 연방준비은행에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것이다. 


 이에 블룸버그 통신은 즉시 정보 공개법에 의거해 금융 위기때 연방준비은행이 실시한 융자 프로그램 11건의 내용을 공개할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12월 12일에는 231페이지에 이르는 관계 서류가 있음이 밝혀졌음에도 "통상과 기업에 관한 정보는 국내 서류와 마찬가지로 연방준비은행 내부에서만 보관할 수 있다"라며 공개를 거부했다고 발표했다. 


 의심을 하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연방준비은행이 실제로 세금을 어디에 융자했는지, 혹시 어디에도 융자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그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아무리 사립 기업이라고는 하지만 국가의 금융 정책을 담당하는 기관이, 그것도 국민의 혈세를 사용하면서 이렇게 불투명 해도 되는 것일까?


 여기에 민중이 공적인 정부조직이라고 착각하도록 '연방준비은행'이란 이름을 썼다. 그 최고 책임자는 대통령이 뽑으며 의회가 승인한다. 형식상이긴 하지만 대통령이 연방준비은행을 통솔하는 FRB의장을 뽑도록 한 것은 마치 국가의 공적기관인 것 같은 인상을 주기 위함이다. 실제로는 데이비드 록펠러가 임명하며 대통령은 이름이 적힌 종이를 읽을 뿐이다.


 고작 사기업의 최고 경영자를 결정하는데 대통령과 의회를 끌어들이는 위선적이고 작위적인 시스템은 국민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키려는 목적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참고로 일본은행의 총재 역시 정부가 후보자를 정하고 이를 의회가 승인함으로써 결정된다. 일본정부는 미국정부와 달리 일본은행의 주식을 55% 소유하고 있다. 일본은행을 통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본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총리에게 총재인선의 권한이 없다. 리처드 A. 베르너가 쓴 <불경기가 끝나지 않는 진짜 이유>에 그사정이 자세히 적혀 있어 내용을 요약해 소개하도록 하겠다. 


 2003년에 고이즈미 총리가 임명하고 의회가 승인해 29대 일본은행 총재가 된 인물은 후쿠이 도시히코다. 그는 35년 전부터 상사로부터 21세기의 일본은행 총재로 지목되었다. 그 무렵부터 '프린스'라고 불렸다고 한다. 35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거품 경제를 발생시킨 1980년대 일본은행의 현장 책임자였던 후쿠이 도시히코야말로 총재 후보들 가운데 '가장 총재로 임명해서는 안 될 인물'이라고 베르너는 평가했다.  


 고이즈미 총리에게는 35년 전에 일본은행에서 결정한 사항을 변경할 권한이 없었던 듯하다. 이 <불경기가 끝나지 않는 진짜 이유>는 일본은행과 언론의 유착 관계를 비롯해 베르너 본인이 체험한 실화를 바탕으로 일반적으로는 알 수 없는 일본의 속사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강력 추천 도서다.


  ◇ '국민을 위한 법률'이라는 거짓말


 지킬 섬의 비밀모임 이후 전국 통화위원회에 제출할 최종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동시에 올드리치 법안이라고 부르는 중앙은행 설립을 위한 법안이 의회에 제출되었다. 국제 금융자본가들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유명한 올드리치의 이름이 붙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는 명백했기 때문에 이 법안은 폐안이 되었다.


 그들은 다음 수를 생각했다. 올드리치가 속한 공화당이 월스트리트와 깊은 유대로 맺어져 있다는 점을 역이용해 민주당의 손으로 중앙은행 법안을 통과시키는 작전을 생각해낸 것이다. 이때 국민을 속이기 위해 사용한 구호는 "월스트리트의 세력을 몰아낸다"는 것이었다. 그 절호의 기회가 1912년 대통령 선거 때 찾아왔다. 2기에 걸쳐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자신의 후계자로 월리엄 태프트를 지명한 뒤 정계를 은퇴했던 시이도어 루스벨트가 제1기 태프트 정권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신당을 결성해 재선을 노리는 태프트의 대항마로 입후보한 것이다.


 태프트는 공화당이면서도 올드리치 법안에 반대했기 때문에 모건은 자신의 대리인을 루스벨트의 선거 운동에 투입시켰다. 자금 지원 뿐만 아니라 그의 연설 초안을 다듬고 월스트리트의 응원세력을 모으는 등 태프트 타도에 전력을 기울였다. 한편 민주당 후보자인 우드로 월슨은 모건의 소유물과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이 선거에서 모건은 두명의 상반된 후보자에게 자금을 지원한 셈이 된다.


 이 두 후보는 "월스트리트의 금융업자를 고발한다"라는, 자신들의 자금원을 공격하는 명백히 위선적인 구호를 동시에 내린 것이다. 20세기 초엽, 미국의 경제는 공화당 정권 아래서 순조로운 약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공화당의 승리가 확실해졌지만, 루스벨트가 입후보함에 따라 공화당의 표가 둘로 갈라져 버렸다. 그리고 결과는 모두가 아는대로 윌슨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는 당선 뒤 곧바로 국민들이 이미 잊고 있던 은행 개혁을 다시 꺼내들고는 금융 시스템에서 국제금융 자본가들을 배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중앙은행 설립을 계획하는 올드리치 법안에 반대한다"라는 공약을 대대적으로 내걸었다. 정치의 세계에서는 100%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국민들에게 태연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모양이다.


 윌슨은 원래 학자 출신으로, 모건 일당이 이 날을 위해 키워낸 존재였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실권은 거의 갖지 못한 채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존재였던 것이다. 새로 국회에 제출된 연방준비은행법은 사실 핵심적인 내용에서 올드리치 법안의 판박이었다. 그들은 '국민을 위한 법률'이라는 거짓말을 사실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한 가지 계책을 꾸몄다.


 국민의 관심사를 법안에서 멀어지도록 하기 위해 올드리치와 한 록펠러 계열의 은행장이 연방준비은행법을 공공연히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주당이 제출한 법안을 공화당의 올드리치가 격렬히 비난하자 일반인들은 경계심을 풀고 말았다. 참으로 비상한 두뇌 플레이였다고 할 수 있다.


  ◇ 은행가들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대통령


 예나 지금이나 의원들은 의회에 제출한 법안을 거의 읽어보지 않는 듯하다. 9.11 동시다발 테러 이후 부시 일당이 내놓은 미국 애국자법에 서명한 한 의원에게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법률에 찬성했느냐고 묻자 그가 한 대답이 참으로 걸작이었다. "제출된 법안의 내용을 일일이 읽었다가는 다른일은 아무것도 못 한다. 그래서 법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 모르고 찬성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 의원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의원들이 법안의 내용 따위는 읽어보지도 않고 주위의 분위기에 따라 찬성이냐 반대냐를 결정한다. 미국 하원의원 나리들의 이러한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올드리치의 두뇌 플레이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 연방준비은행법은 음흉한 설립 동기나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수상한 명칭도 그렇지만, 의회에서 통과시킨 방법 또한 사기였다. 많은 의원들이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 12월 22일에 753명의 하원의원 중 358명이 298대 60으로 , 상원의원 100명 중 68명이 43대 25로 연방준비은행법을 통과시킨 것이다.


 대서양 단독 비행으로 유명한 린드버그의 아버지는 하원의원이었는데, 투표 직후 "이 법안이 성립되면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괴물 업자가 탄생한다. 대통령이 이 법안에 서명한다면 금융 조직 조사를 통해 그 존재가 확인 된, 돈으로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정부가 합법화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이름만 바꾼 올드리치 법안이다. 이 새로운 법률대로라면 금융업자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근대사에서 연방준비은행 설립은 민주주의 승리로 인식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것만큼 진실과 거리가 먼 견해는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꼭두각시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중앙은행 설립을 입법화했다. 이 법안에 서명한 윌슨은 재임 중인 1919년에 당시의 서명을 후회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나는 순간의 실수로 이 나라를 망쳐 버렸다. 이 위대한 산업 국가는 이제 금융 제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일반 민중을 속이기 위한 거짓으로 점철된 중앙은행 입법화가 성립된 1913년은, 미국이 다시 영국의 식민지로 돌아간 상징적인 해라고 할 수 있다. 진짜 비극은 국민 대다수가 그 사실을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꼭두각시 인형이었던 것은 윌슨만이 아니다. 2008년에 임기를 마친 제43대 대통령 부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을 영국의 식민지로 되돌린 상징적인 사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1913년에 연방준비은행이 설립되었고, 둘째 2001년에 동시다발 테러 이후 성립된 각종 법률로 미국 헌법이 보장하던 인권이 무력화 되었으며, 세째 2008년의 금융 위기 후 공적 자금을 투입해 국영기업들을 민영화한 것이다. 미국을 근본부터 바꿔버린 이 세가지 사건은 모두 은행가들의 꼭두각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일어났다.


  ◇ 독자 화폐를 발행하면 원금과 이자를 낼 필요가 없다 (과거의 풍요롭던 미국)


 통화를 발행하는 곳은 그 나라의 중앙은행이다. 따라서 현재 유엔에 가입한 192개국 중에 중앙은행이 있는 나라의 정부는 자국에서 통용되는 통화의 발행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신들이 통화를 발행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경기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다. 필라델피아에서 신문을 발행하던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은 "식민지에서만 통용되는 지역 통화를 발행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신문에 자주 실었다. 이후 그는 1757년에 영국으로 건너가 18년 동안 살게 된다. 프랭클린은 없었지만 식민지 정부는 이윽고 식민지에서만 통용되는 지역 지폐를 발행해 사용하게 되었다.


 모든 식민지의 이름을 연결한 디자인에 그 중앙에는 '우리는 하나'라고 적혀 있는 지폐였다. 인쇄도 조잡하고 태환기능도 없었지만 13개 식민지 정부는 이 지폐를 식민지 내부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식민지 미국은 18세기 중엽까지 그리 풍요롭지 못했다. 이 지역 지폐가 유통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물자의 유통이 활발해지고 식민지 사이에 연대감이 싹트며 식민지 전체의 경기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어느날, 영국은행의 임원 한 며이 영국에 체재 중인 프랭클린에게 최근 식민지의 경제가 활황을 보이는 이유를 물었다. 영국의 은생시스템을 잘 알고 있던 프랭클린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간단합니다. 식민지에서 우리는 독자적인 지폐를 발행했습니다. 산업과 상업의 적절한 조화를 위해 발행했지요. 그러자 생산물이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었습니다. 독자적인 지폐를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는 물자를 구입할 능력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이자를 낼 필요가 없지요."


 이 말을 듣고 임원은 깜짝 놀랐다. 그는 즉시 국왕인 조지 3세에게 이 지역 지폐를 금지하도록 요청했다. 영국 의회는 1764년에 통화 법안을 발의해 식민지의 지역 지폐를 금지하고 그 대신 영국은행의 금화와 은화를 사용하도록 명령했다.


 다음은 프랭클린 자서전에 적혀 있는 문장이다.


 "1년 사이에 경제 상황은 급변했고, 번영의 시대는 끝났다. 그리고 식민지의 거리가 실업자들로 가득 찰 정도의 불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런 내용도 적혀 있다. "실업과 불만을 가져온 식민지 지폐 단속을 영국이 실시하지 않았다면 식민지의 사람들은 차와 다른 물품에 내는 세금을 부담할 수 있었다. 조지 3세와 국제 은행가들로부터 자신의 화폐를 영원히 발행할 권리를 되찾지 못하던 것이 독립 전쟁의 첫 번째 요인이다."


<세계 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제2권   기쿠카와 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