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도서/세계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

2권1장. 세계의 돈을 지배하는 초권력자들의 뿌리 5

생활건강 연구가 2019. 12. 20. 08:52


2권1장. 세계의 돈을 지배하는 초권력자들의 뿌리 5


   ※ 독후감

 

 세계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은 은폐와 조작, 거짓의 달인들이다. 미국의 남북전쟁의 원인은 링컨의 노예해방 정책이 아니라 미국을 두개의 연합정부로 분열시키려는 전략 때문이었다. 하나의 국가로 결속하면 경제와 금융의 독립성을 쟁취할 것이기에, 어둠의 세력은 세계지배가 실패할수도 있음을 두려워 했던 것이었다.


 어둠의 세력인 국제 금융자본가들은 적을 키워 자신들을 이롭게 한다. 히틀러가 그랬고, 구소련이 그랬다. 구소련이 사라진 지금은 '테러'라는 실체없는 적을 만들어 내고 있다. 어둠의 세력이 히틀러를 지원하고, 구소련 건설의 공로자인 레닌, 트로츠키를 지원해 10월 혁명을 성공하게 만들었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그들의 '부자놀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어둠의 세력인 국제 금융자본가들의 특질은 그 잔학성에 있다. 그들의 지원한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중국의 문화혁명으로 수천만명의 양민들이 학살되었다.

생활건강연구가  생태농부


2권1장. 세계의 돈을 지배하는 초권력자들의 뿌리 5

  ◇ 남북 전쟁의 숨은 진실 - 분단시켜 지배하라


 어둠의 세계 금융이 의도적으로 은폐한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겠다. 성공은 하지 못했지만, 남북 전쟁이라는 신흥국 미국을 둘로 쪼갠 사건이 그것이다. 미국의 남북 전쟁 발발의 진상은 유럽의 은행가들이 꾸민 '분단 전략'이었다. 소국 프러시아의 재상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한 말이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남북 전쟁이 끝난지 11년 뒤인 1876년에 한 발언으로 역사 시간에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똑같은 국력을 지닌 균등한 두 개의 연합 정부로 미합중국을 분열시키는 것은 남북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이미 유럽 금융계의 지배자들이 결정해 놓은 사항이었다. 만약 미국이 하나의 국가로 결속을 유지한다면 경제적으로나 금융적으로나 독립성을 쟁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노리는 세계지배가 실패할 것임을 은행가들은 두려워했다.(비스마르크)"


 수많은 소국으로 분열되어 서로 으르렁대던 독일을 1871년에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통일한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도 로스차일드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833년에 디즈레일리를 통해 18세의 젊은 비스마르크와 친교를 맺은 라이오넬 로스차일드는 그를 미래에 유럽을 이끌 보수계 지도자로 만들기로 했다.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한데도 뒷이야기가 있다.


 그의 여동생이 라이오넬 로스차일드와 연결된 프러시아의 각료와 결혼한 것이다. 처남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인데, 비스마르크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독일이 통일한 해인 1871년에 그는 "내가 생각하기에, 정계의 명사가 명성을 얻는 과정에서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더라도 적어도 자신이 예기치 못했던 환경의 덕을 볼 때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유럽의 정계를 뒤에서 움직이는 사람들과 접할 수 있는 환경에 있었던 비스마르크이기에 남북 전쟁에 관한 그의 발언은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의 역사 시간에는 링컨이 노예제도를 없애려 하자 남부의 각 주들이 이에 반발한 것이 남북 전쟁이 원인이라고 배웠다. 진상은 완전히 다른곳에 있었던 것이다.


  ◇ 국제 금융자본가들을 이롭게 하는 '적'을 키운다


 커다란 거짓말의 대표적인 예가 공산주의 사상에 관한 것이다.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자세히 쓰여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분명히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라는 개념을 쓰기는 했지만, 그가 책에 쓴 공산주의 체제는 자본주의가 완전히 숙성된 끝에 노동자 계급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사회 제도라고 규정한 것이다.


 즉 마르크스가 볼 때 자본주의도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탄생한 소련과 중국 등의 이른바 공산주의 국가는 바람직한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서 탄생한 사이비 공산주의 국가는 유럽의 금융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마르크스 사상의 이름만 빌려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치 체제를 확립한 것이 그 진정한 모습이다.


 일루미나티가 꿈꾸는 사회 체제마르크스가 주장하는 공산주의 사회에 가깝다. 즉 다음 장에서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소련을 실험체로 사용해 세계 제패의 실마리를 찾고자 한 것이다. 소련의 계획 경제가 점점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데이비드 록펠러의 지시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라고 덩샤오핑에게 말하게 하고 공산 중국의 방향 전환을 실행 시킨 것이다.


 개혁 개방 노선이라는 이름 아래 '사회주의 시장 경제'로 알려진 중국의 시스템은 사회주의인 채로 자본주의를 실행한다는 모순적인 경제 체제를 실험하고 있다. 다만 현재로서는 성공적인 듯, 데이비드 록펠러가 "중국을 국가 건설의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에지마 다카히코시가 번역한 <록펠러는 다음 초강대국을 중국으로 정했다>라는 책에는 원제인 <신세계 질서 폭로>에서도 축측할 수 있듯이 미국을 붕괴시키기 위해 록펠러 가문이 저지른 악행이 소개되어 있다. 데이비드 록펠러가 왜 중국을 마음에 들어 하는지 그 경위에 대해서도 나와 있기 때문에 필자가 강력 추천하는 책이다.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


 냉전 중에 벌어진 미소 두 나라의 치열한 다툼은 수많은 영화의 소재로 사용되어 왔었다. 세계를 양분했던 이 두 나라의 세력 다툼은 계산적으로 연출된 것이었다. 제2차대전 후, 국토에 전쟁의 불길이 미치지 않았던 미국이 미증유의 번영을 이룩할 것은 누가 봐도 뻔한 사실이었다. 그래서는 세계 통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데이비드 록펠러는 강력한 '적'을 만들어 서로 경쟁하게 했다.


 국방비의 거액의 세금을 할애하게 함으로써 경제와 교육 등 국내 발전 기반을 충실히 하기 위한 예산을 줄여 미국의 발전 속도를 반감시키려 한 것이다. 잠시 동안은 성공하는 듯했던 이 작전도 믿었던 소련 경제가 침체에 빠짐에 따라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말았다. 한 때는 중국을 미국의 '적'으로 키울까도 했지만, 소련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아예 방향 전환을 시킨 것이다. 현재는 최혜국 대우를 하며 당당히 원조를 하고 있으니 도저히 '적'으로는 활용할 수 없다.


 그 결과 소련을 대신해 만들어진 '적'이 바로 테러다. '테러'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념이므로 특정한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필요한 때는 언제라도 상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부시 정권의 부대통령이었던 딕 체니가 "향후 50년은 계속 될 싸움"이라고 말한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군수 산업과 펜타곤은 앞으로 50년간은 국방비 삭감 때문에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국내 문제에 사용되어야 할 예산이 군사비로 전용됨에 따라 미국의 국가 부채는 필요 이상으로 계속 불어나게 되었다.


   ◇ 구미의 은행가들이 키운 혁명가 레닌


 이번에는 공산주의 국가의 탄생과 관련된 거짓말을 소개하겠다. 1991년에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 우리는 공산주의 국가가 자유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나쁜 존재라고 믿어 왔다. 액션 영화에서 소련은 단골 악역이었고, 억양이 강한 독특한 말투가 너무나도 악당이라는 이미지를 줬다. 이는 냉전의 확대를 정당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장한 것이었다.


 아는 사람도 많겠지만, 오랫동안 절대 군주제였던 제정 러시아는 1906년에 니콜라이 2세가 국회를 개설하고 헌법을 재정함으로써 입헌 군주국이 되었다. 1906년의 대 기근을 계기로 사회가 불안해졌기 때문에 당시 총리의 진언으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했다. 300년간 계속되던 로마노프 왕조는 소비에트 연방 수립 8개월전인 1917년 3월에 종언을 고한 것이다.


 이때 사회 불안의 원인이 되었던 수많은 농민과 공장 노동자들은 사실 주로 로스차일드 가문이 뿌린 거금에 선동된 것이었다. 니콜라이 2세가 유대인을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중앙은행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재정 러시아 타도 운동에 장기간 자금을 지원해 왔다. 퇴위한 황제 일가를 영국으로 망명시키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결국 황제 일가는 서시베리아로 유폐되었다. 그곳에서는 니콜라이 2세를 필두로 가족 모두가 결속해 생활했다.


 황제 퇴위 직후부터 국회의원들과 민중을 대표하는 멘셰비키, 사회 혁명당의 연대로 임시 정부가 탄생했다. 훗날 공산 소련을 설립하는 볼셰비키라는 그룹은 당시로서는 소수파였고 임시 정부 내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없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불안정한 상황을 이용해 러시아를 차지하려고 한 자들이 바로 구미의 은행가들이다. 그들은 먼제 레닌을 러시아로 보냈다.


 1905년 이래 서유럽을 떠돌던 그는 니콜라이 2세가 퇴위했을 무렵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러시아 황제가 퇴임한지 1개월 뒤인 1917년 4월, 그들은 대륙 횡단 열차를 봉인해 속에 누가 탔는지 알 수 없게 하고 5~600만 달러에 이르는 금괴와 함께 레닌을 태운 뒤 당시 러시아와 전쟁 중이던 독일 국내를 가로질러 러시아로 보냈다.


 록펠러 가문은 국외추방 처분을 받아 뉴욕시의 로워이스트사이드에 있었던 트로츠키에게 당시 돈으로 2,000만 달러를 주고 러시아로 보내려 했다. 트로츠키를 태운 배가 275명의 동료들과 함께 1917년 3월 27일에 뉴욕을 출항했는데, 첫 기항지는 캐나다의 핼리팩스였다. 그곳에서 캐나다 당국은 국제적인 위험인물인 트로츠키를 체포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거액의 돈도 몰수한 뒤 교도소로 보냈다. 그런데 닷새 뒤에 갑자기 영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트로츠키를 풀어 주시오"라고 압력을 넣었다. 결국 트로츠키는 미국 여권을 사용해 캐나다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거금을 소지한 이 두 명은 러시아 국내로 돌아온 뒤 뇌물과 교활한 지혜, 잔악한 행동, 사기적인 행위를 구사해 임시 정부의 내부를 있는대로 뒤흔들었고, 10월에는 정권을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레닌은 12월에 신설된 비밀 경찰을 서시베리아로 보내 조용히 살고 있던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 7명, 종자 3명, 주치의 1명을 1918년 7월 18일에 총살했다. 참고로 이 때 트로츠키는 니콜라이 2세가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레닌에게 묵살되었다.


 레닌이 이끄는 볼세비키가 세력 싸움에서 승리해 정권을 차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로스차일드 계열 은행이 거금을 준비해 그들을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돈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역사 시간에는 "러시아 황제의 압정에 신음하던 민중이 봉기해 부를 일반 민중에게 평등하게 나눠주는 사회제도로서 공산주의 국가가 설립되었다..."라고 가르치지만 그 실태는 전혀 다른 것이다.


구미의 은행가들이 지원을 했음에도 이 사실은 역사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다. 자본주이 세계의 부자들이 공산주의를 지원했다고 하면 말이 되지 않으므로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이렇게 중요한 시실이 미국 국내에는 전혀 알려겨 있지 않다. 한편 레닌 일당의 잔학성은 유명해서, 자유의 나라  미국의 국민들은 1933년까지 공산 소련의 국가 승인을 하지 않았다. 레닌 일당의 잔학성에 대한 언론의 보도에는 장래에 공산주의 국기 소련을 미국의 '적'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한편으로 미국 국내에도 공산주의 사상을 퍼트리려고 했으니, 언뜻 모순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이러한 행동은 나로서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레닌이 권력을 잡았다고는 하나 소련 사회는 제정 러시아 시대와 비교해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농노 해방으로 늘어난 수많은 농민들과 산업 혁명으로 불어난 공장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계속 터져 나왔다. 그런 후진국 소련에 거액을 투자해 각종 공장을 건설하고 발전된 미국의 과학기술을 유출해 단기간에 미국과 맞먹는 초강대국으로 만든  장본인은 록펠러 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미국의 은행단과 경제계였다. 이 사실은 언론의 의도적인 은폐 때문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 공산 중국을 만든 미국의 양다리 전략


 공산 대국인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에도 역사 교과서에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 사실이 숨겨져 있다. 제2차대전 후 중국 대륙의 처리에 관해서는, 순리대로라면 쑨원의 뒤를 이은 장제스의 국민당이 정권을 잡아야 했다. 그러나 마오쩌뚱의 공산당을 지원해 그에게 정권을 건넨 것은 앞에서 다루었던 태평양문제조사회(IPR)이였다.


 그 배후에는 영국의 왕립국제문제연구소의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태평양문제조사회를 이용해 활동한 중심 인물은 당시 국무장관으로서 전후 유럽의 부흥 계획을 입안하고 실시한 공으로 1953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조지 마셜이었다. 즉 교과서에서는 절대 가르쳐 주지 않지만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두 강대국 모두 자본주의 사회의 사람들이 만들어냈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인 것이다.


  ◇ 이스라엘 건국의 거짓말


 이번에는 역사의 거짓말과 관련된 이야기로 이스라엘 건국에 관한 거짓말을 소개하겠다. 큰 돈을 가지면 사람이 바뀐다는 말은 우리 같은 없는 사람들이 만져보지 못했던 거금을 손에 넣었을 때의 변화를 나타낸다. 원래부터 돈이 많았던 사람은 지루함을 달래고자 거대한 프로젝트를 생각해내고는 돈이 아무리 많이 들어가도 신경쓰지 않고 그 과정을 즐길 때가 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로스차일드가 생각해낸 이스라엘의 건국이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마이어 암셀이 꿈꾸던 세계 통일이라는 목적에 역행한다. 따라서 다섯 갈래로 갈라진 로스차일드 일가가 반드시 항상 일치단결해 행동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로스차일드가 건국한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한 중동에 평화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목적인 세계 통일 역시 완성될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이스라엘 건국에 직접적인 공헌자가 그 무렵 팔레스티나 땅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 정부로부터 유대인 국가 설립을 약속받은 런던의 로스차일드 가문이었음은 아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건국의 실질적인 공로자는 파리의 로스차일드 당주 에드몽 로스차일드다. 그가 당시 영국의 위임 통치려이었던 팔레스티나의 토지를 사들이기 시작한 것은 이스라엘이 건국하기 66년 전인 1882년이었다. 건국 후 30년이 지난 1978년에는 이스라엘 국토의 80%를 로스차일드가소유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컬럼비아 대학의 교수인 사이먼 샤머가 쓴 <두 명의 로스차일드와 이스라엘>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 


 오늘날에 이스라엘은 유대인 국가로서 700만 명이 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인구 밀도도 일본보다 높다. 유엔의 분류로는 선진국에 들어갈 정도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처음에는 로스차일드가 토지를 산 것에 비하면 생각만큼 유대인의 입식이 진행되지 않았다. 현재도 시오니즘에 반대하는 유대인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부와 동부 유럽에 사는 유대인들은 당시 시오니즘 운동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런 상황에서 유대인이 너도나도 사막의 땅 이스라엘로 이주를 시작하는 계기를 만든 이는 바로 히틀러였다. 


 선조의 땅 팔레스티나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 운동 자체는 에드몽 로스차일드의 도락을 추진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914년에 에드몽이 "내가 없었다면 시오니즘 운동은 전혀 진전되지 않았을 것이며, 시오니즘 운동이 없었다면 내 프로젝트는 죽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즉 시오니즘 운동은 에드몽의 장난감을 완성시키기 위한 도구의 하나로서 그가 부흥시킨 것이다. 거기에는 조국을 잃은 민족의 향수 같은 낭만적인 면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정적인 자료로는 뉴욕 타임스사의 베스트셀러를 보유한 이스라엘의 톱 저널리스트 아모스 엘론이 쓴 <이스라엘, 그 건국자와 자손들>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에드몽이 추진한 입식 사업을 '부자의 놀이 도구'라고 명확히 평가한 것이다. 한 명의 초갑부가 시작한 놀이 때문에 오늘날까지 얼마나 많은 팔레스티나 사람들이 가족을 잃고 집을 잃었으며 불안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는지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이 복잡해진다.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은 점은, 이스라엘 건국이 어둠의 세계 금융 전체의 동의에 따라 실시된 계획이 아니라는 것이다. 훗날 록펠러 가문에서 중동 평화 해결을 위한 즉효약으로 이스라엘 국민 전원에게 100만 달러씩 주고 애리조나로 이주시키자는 안이 검토되었다는 일화를 봐도 분명하다. 이것은 외교문제평의회 종신회원인 니콜라스 록펠러가 영화감독 루소에게 한 이야기다.


 결과적으로 에드몽의 꿈을 실현하도록 도와준 인물은 히틀러인데, 정신분석학자인 월터 랑거는 제2차대전 중에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작성한 히틀러에 관한 보고서를 전후에 <히틀러의 정신 분석>이라는 책으로 냈다. 이 책에는 히틀러가 빈 로스차일드 가문의 당주의 피를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제시되어 있다. 이것을 조금 비뚤어진 시각으로 보면, 유대인 학살을 자행해 유대인의 '적'으로 여겨지고 있는 히틀러는 사실 유대인인 로스차일드가 이스라엘 건국을 추진하기 위해 사용한 도구 중 하나였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 '국가와 종교와 사유 재산을 폐지' (프랑스 혁명의 잔학함)


 어둠의 세계 금융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중요한 특질 중 하나인 잔학성이 잘 드러난 사례를 소개하겠다. 현재 그들의 사상과 행동의 원천인 일루미나티 운동이나 여기에서 파생된 공산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모두 매우 잔인하다. 그 좋은 예가 스탈린의 숙청이나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이다.


 한때 나는 서양인의 잔인함이 수렵 민족의 DNA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나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도 대학살을 자행한 것을 보면 잔인함은 수렵 민족의 민족성과는 관계가 없으며 아무래도 사상적 문제가 아닐까 싶다. 일본에서도 1972년에 일어난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일약 세상의 주목을 받은 일본 적군은 심한 린치 끝에 동료를 죽이는 것을 '총괄'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행동을 일상적으로 저질렀으니 잔학함은 민족이나 인종과는 관계가 없는 듯하다.


 잔학함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789년 7월 14일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된 프랑스혁명이 최초일 것이다. 아담 바이스하우프트가 설립한 일루미나티는 독일 바이에른 정부의 단속으로 1784년에 역사의 무대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사실 그는 조직을 프리메이슨 족직 속에 숨기느데 성공했다. 역사 속에는 일루미나티와 프랑스 혁명의 직접적인 관계가 나와있지 않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에 사용된 '국가와 종교와 사유재산을 없앤다'는 표어는 원래 일루미나티가 사용하던 것이다.


 7월 14일은 파리 축제(혁명 기념일)로 유명하다. 학교의 역사 시간에는 이날 민중이 궐기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의 테마인 자유, 평등, 백애가 그 후 전 세계 민주주의 토대가 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자유, 평등, 박애라는 미명에 감춰져 있기는 하지만, 단두대에 목이 잘린 앙투아네트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비정한 학설 방법으로 목숨을 잃었다.


 먼저 바스티유 감옥의 사령관과 사관 세 명, 수비병 세명이 길 한폭판에서 목이 잘려나갔으며, 군중들은 그 목을 창끝에 꽂아 높이 들고 시내를 행진했다. 시 청사에 도착한 군중들은 시장과 다른 두 고관의 목을 잘랐고 그들의 목도 앞의 일곱 명과 똑같은 운명이 되었다.


 일루미나티와 프랑스 혁명의 관계와 당시의 잔학함을 이해할 수 있는 정보가 있다. 콜먼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거지와도 같은 생활을 하던 바이스하우프트는 암셀의 부름을 받고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 수백만 프랑을 가지고 파리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적어도 3만 명이 넘는 흉악범을 유입시켜 파리의 빈민굴에 대기시켰는데, 이 흉악범들이 일제히 파리 시내로 쏟아져 들어온 시기가 바로 1789년이었다.


 프랑스 혁명 때 파리 시내에서는 약탈과 파괴가 횡행했음이 알려져 있다. 또 바이스하우프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라고 공공연히 말해왔다. 이 사실을 감안하면 프랑스 혁명에 일루미나티가 관여했다는 설은 신빙성이 있다.


  ◇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대량 학살의 역사


 일루미나티 뿐만 아니라 그 사상의 흐름을 이어받은 공산주의자들도 역사에 남을 학살을 많이 저질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공산덩 선언>을 보면 기존의 사회 질서는 폭력적으로 전복되고 공산 국가가 달성된다고 나와 있는데, 이것을 따른 것일까? 1997년에 프랑스에서 간행된 <공산주의 흑서>라는 중요한 문헌이 있다. '국제 전략 칼럼'이라는 사이트가 정리한 내용에서 몇 부분을 발췌해 소개하겠다.


 먼저 구소련부터, 1997년 11월 6일에 모스크바 방송은 "10월 혁명이 일어난 1917년부터 구소련시대 동안 6,200만 명이 살해당했고, 그중 4,000만 명이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레닌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국내에서 400만 명의 목숨을 빼앗았으며, 스탈린은 1,26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라고 보도했다. 모스크바 방송이 공산 소련 건국의 공로자인 두 사람의 죄상을 방송한 것이니, 글라스노스트라고 부르는 정보 공개는 사실인 듯하다.


 다음에는 중국을 살펴보자. 마오쩌둥은 1957년 2월 27일, "1949년부터 1954년까지 80만 명을 처형했다"라고 자신의 입으로 말했다. 저운라이는 같은 해 6월에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1949년 이래 '반혁명'이라는 죄목으로 체포한 사람 중 16%에 해당하는 83만 명을 처형햇다고 보고했다. 또 42%는 강제 수용소로 보냈으며, 32%를 감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오쩌둥은 그 후에도 많은 권력 투쟁과 실정을 거듭했는데 <인화 1958~1962 : 아사자 2,000만 명의 광기>의 저자인 딩수 등의 조사에 따르면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을 통해 2,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딩수의 책은 마오쩌둥 지휘 하의 광기를 이해하는데 좋은 책이다.


 그렇다면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은 어떨까? 베트남 100만 명, 북한 200만 명, 캄보디아 200만 명, 동구권 100만 명, 라틴 아메리카 15만 명, 아프리카 170만 명, 아프가니스탄 150만 명 등, 모두 합쳐 무려 4,535만 명이 원치 않는 죽음을 당했다. 2007년 7월에 실시된 세계 및 한국의 인구현황 결과를 보면 한국의 인구는 약 4,800만 명이므로 그 중 99%에 해당하는 숫자다.


<세계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제2권   기쿠카와 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