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도서/세계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

제3장. 국제 금융자본가들 목표는 '세계 지배' 3

생활건강 연구가 2019. 12. 10. 06:30


제3장. 국제 금융자본가들 목표는 '세계 지배' 4


  ※독후감

 

 로스차일드 가문의 기원은, 1743년에 모제스 암셀 바우어라는 유대인 '금 세공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독일에서 빨간 방패라는 동전 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아들이 가계 이름을 빨간 방패의 독일어 표기인 로스차일드로 성을 바꾸었. 파리 로스차일드 은행 자산은 프랑스 국왕보다도 재력이 강했다고 한다.


 록펠러는 자선가로 알려져 있고 침례교를 신앙하는 종교인으로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로스차일드의 후원으로 성장했다. 이 두 가문으로 대표되는 금융자본가들은, 연방은행으로부터 빌려간 돈을 국민의 세금으로 이자를 충당하도록 제도화시켰다.


 레이건은 그레이스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역대 어느 정권도 조사하지 않았던 세금의 사용처를 조사하게 하였다. 여기서 미국인들의 내는 소득세는 단 1센트도 국민을 위해 쓰지 않고 연방은행에 이자로 지불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불만을 가진 금융자본가들이 레이건을 암살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국제 금융자본가들은 미국 대통령도 마음에 안 들면 암살시킬 만큼 막강한 세력이며 전세계 중앙은행을 장악하여 국민의 세금을 자기들의 호주머니에 넣고 있다. 세상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국제 조폭이 날뛰는 세상이라고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런 세상에 살아가는 일반 민중들은 행복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생활건강연구가  생태농부


제3장. 국제 금융자본가들 목표는 '세계 지배' 4

◇ 로스차일드 가문의 발흥


 국제 금융자본가의 선구가 된 로스차일드 가문의 기원은, 1743년에 모제스 암셀 바우어라는 유대인 금 세공인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빨간 방패'라는 동전 가게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그의 아들인 마이어 암셀 바우어가 가게 이름인 빨간 방패의 독일어 표기인 로스차일드로 성을 바꾼 것이 로스차일드의 정식적인 시작이다.


 이때 로스차일드가 살고 있던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게토(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의 집에서 같이 살던 가족이 있었는데 바로 시프 일족이다. 훗날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차일드의 대리인으로 활동하며 거액의 부를 쌓게 되는 야코프 시프는 18세가 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마이어 암셀은 일반인보다 왕족이나 귀족과의 거래에 전념하며 유럽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의 기초를 쌓았다. 그는 18세기 후반에 장남인 암셀 마이어에게 본점인 프랑크푸르트를 계승하게 하고 나머지 네 아들을 빈과 런던, 나폴리, 파리로 보내 각각 은행을 설립하게 했다. 그 나라의 왕족, 귀족들과 거래를 하게 한 결과, 당시 식민지 경영으로 번영을 구가하던 유럽의 모든 주요 국가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이 소유한 은행이 중앙은행이 되었다.


 그들의 이익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말해주는 한 예가 있다. 파리 로스차일드 은행의 자산당시 프랑스에 있었던 모든 은행의 자산을 합친 것보다 훨씬 많았으며 프랑스 국왕보다도 재력이 강했다고 한다.


 서양의 주요 국가 중에 로스차일드 가문이 진출하지 못한 나라가 있었는데, 바로 제정 러시아였다. 로스차일드는 러시아 타도에 심혈을 기울여 당시 돈으로 2억이라는 거금을 퍼부었다. 유대인을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한 니콜라이 2세 타도에 집념을 불태운 것이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에 자금을 지원한 것도 로스차일드다. 전쟁 비용 조달을 위해 일본은행 부총재인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구미를 돌아다녔지만, 일본의 국력으로는 러시아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일본 국채를 사지 않았다.


 그런데 로스차일드의 명령을 받고 미국의 은행가 야코프 시프가 국채를 전부 사줬던 것이다. 그 덕분에 일본은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고 결국 승리할 수 있었다. 일본은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는데 실패했고, 그 결과 전후 오랫동안 전쟁국채를 갚기 위해 많은 고생을 했다. 결국 다 갚기는 했지만.....


 러일전쟁은 근대에 들어와 비백인 국가가 백인 국가에 승리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것이 식민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독립 운동을 펼치던 수많은 비백인 국가의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은 상당했다. 인도가 독립한 뒤 초대 수상이 된 자와할랄 네루는 일본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암흑 소에서 빛을 보았다." 라고 말했다.


 네루는 17세기 중반 이후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독립을 위해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싸운 인물이다. 러일 전쟁 이후 독립 운동이 전 세계에서 활발하게 펼쳐진 것은 역사상의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정 러시아 타도라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집념이 없었다면 세계사에 남을 이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고 할 수 있다.


 학교 역사 시간에는 가르쳐주지 않지만, 근대사에 기록된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은 이 금융 자본가들의 존재를 빼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금융 사업으로 시작해 군사를 포함한 정치 이외의 다양한 분야에 진출했다. 또 결혼을 통해 유럽의 상류 계급과 골고루 뿌리를 내렸다. 특히 로스차일드의 지배가 두드러진 나라가 영국이다. 귀족 사회를 포함해 정계를 제외한 각종 분야에서 로스차일드의 피가 섞인 사람들이 활약하고 있다.


 로스차일드 본가를 계승하는 역대 당주는 세계 제2의 금융 도시 런던에 있는 시티 오브 런던이라는 세계의 중심 지역을 지배하는 13인 위원회의 수장으로 군림하고 있다.


 로스차일드가 유럽에서 얼마나 힘이 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나치스 독일이 파리를 점령했을 때 파리의 로스차일드 가문 사람들은 이미 미국으로 도망친 뒤였다. 그들의 호화로운 저택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나치스 사령관은 그들이 두려웠는지 점령 중에도 그 저택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미국의 록펠러 가문은 초대가 실업계에서 거대한 부를 쌓았고, 2대째부터 금융에 중심을 두었으며, 지금은 정계에도 진출했다. 정계에는 진출하지 않은 유럽의 로스차일드 가문과는 다른 발전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한쪽은 WASP이고 다른 한쪽은 유대인이라는 차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 록펠러 가문의 발흥


 미국의 금융 자본가는 야코프 시프와 제이피 모건으로 대표된다. 그들과 같이 유럽 로스차일드 가문의 지원을 받아 당시 아직 신흥 국가였던 미국의 산업 진흥에 투자해 거대한 부를 쌓은 인물은 많다. 록펠러 가문의 기반을 쌓은 존 D. 록펠러는 그중에서도 매우 특이한 존재다. 그는 회계사로 시작해 석유 산업으로 진출했다. 당시 가장 세력을 떨쳤던 제이피 모건으로부터 융자를 받아 사람들에게 비겁한 사내란 비난을 받으면서 스탠더드 석유를 창업했다. 거의 위법에 가까운 수법을 동원해 미국 석유 관련 사업의 90%를 지배하는 거대 회사로 성장시켰다.


 석유 사업 독점을 이용해 석유를 비싼 값에 팔아 거액의 부를 쌓았다. 높아지는 비난에 정부는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고, 결국 독점 금지법을 적용했다. 이렇게 해서 스탠더드 석유는 34개 회사로 분리되어 오늘날의 모빌, 암코, 엑슨, 셰브론이 되었다.


 존 D. 록펠러는 종교적으로는 허식을 금하고 소박함을 미덕으로 삼는 크리스트 신교의 일파인 침례교를 믿었다. 1900년대 초반에 당시 돈으로 수십 억 달러를 들여 뉴욕 시 교외에 지은 자택에는 오락과 관련된 시설이나 방이 하나도 없었다. 가족이 쉴 거실과 식사를 하기 위한 식당이 대부분을 차지해, 거대한 부를 소유한 가족의 집치고는 상당히 소박하게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믿었던 종교가 화려한 생활을 죄악시했기 때문에 평생 그 가르침을 지켰던 것이다.


 그는 원래 자선가였던 듯하다. 일개 회계사였던 시절부터 그는 자신의 수입 중 10%를 매달 자선 활동에 기부했다. 이 때문에 그가 숨을 거둘 무렵에는 그 많았던 재산이 가족에 대한 상속과 수많은 자선 사업, 기부로 크게 줄었다고 한다. 그의 뒤를 이어 거액의 재산을 상속받은 아들이 같은 부지에 집을 지었는데, 그 집은 아버지가 지었던 건물보다 세 배나 컸다. 또 9홀의 골프장과 야외 수영장, 테니스 코트를 집 주변에 설치하고 집 안에는 당구장과 볼링장, 파티용 대형 연회장을 만들었다. 이 광대한 부지에는 지금도 록펠러 가문의 열 가족이 살고 있다.


 제2대 당주인 존D. 록펠러 2세는 어렸을 때부터 화려한 생활이 몸에 익은 탓인지 초대 당주와는 생활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생각도 달라서 초대가 거액의 부를 쌓은 실업계에서 벗어나 금융업계에 진출했고, 이윽고 체이스 은행을 지배 아래 두었다.


 참고로 초대 당주인 존D. 록펠러의 동생 월리엄 록펠러는 시티은행의 전신인 뉴욕 시티은행의 설립에 관여했다. 그의 손자인 제임스는 시티은행의 은행장으로 취임했다. 즉 뉴욕의 2대 은행인 체이스와 시티는 모두 록펠러의 영향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 록펠러 저택에 장식된 피카소 작품은 볼만하다


 초대 록펠러가 지은 집은 포드 정권의 부통령이었던 넬슨 록펠러(록펠러 가문의 3대 당주)가 1979년에 사망한 뒤 국가에 기부해 지금은 미술관이 되어 일반인이 견학할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 그곳에 세 번 갔다. 거실에서 바라보는 허드슨 강의 경치와 집 안에 진열된 고금동서의 훌륭한 도자기, 방 안 한쪽 구석의 탁자 위에 놓인 로댕의 조각, 정원에 배치된 자코메티, 이사무 노구치 등 일류 작가의 오브제.....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멋진 곳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지하에 있는 스산한 홀의 천장에 매달려 있는 피카소의 태피스트리(실로 짜는)다.


 이것은 넬슨이 피카소에게 직접 부탁한 작품이다. 20세기 최고의 태피스트리로 일컬어지는 10장 정도의 작품으로 대부분 추상화인데, 높은 천장에서 바닥까지 닿을 정도로 커다란 작품인 만큼 굉장한 박력이 있다. 서양에는 오래전부터 태피스트리가 있었다. 다른 미술관에서도 중세의 작품 등을 본 적이 있지만, 그런 작품에는 흥미가 없었다.


 구 록펠러 저택의 태피스트리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작품이었다. 피카소의 추상화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높은 천장에서 바닥까지 닿을 만큼 웅장한 크기에 박력이 있어 액자에 담겨 벽에 걸린 그림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무조건 크다고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여기에 있는 피카소의 작품은 한 번쯤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곳에 갈 때마다 한 손에 포도주잔을 들고 그 태피스트리 앞에 서서 천천히 피카소의 세계에 빠져들고 싶다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곤 한다.


  ◇ 소득세를 징수하는 국세청은 헌법 위반


 현재 미국에서는 연방준비은행이 통화 발행권을 쥐고 있다. 정부는 돈이 필요하면 연방준비은행에서 빌리게되며, 그때마다 이자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 미국 정부는 조폐국에서 인쇄된 모든 지폐에 대해 이자를 내야 할 의무가 발생하는 것이다.


 현재의 연방준비제도가 설립되었을 당시(1913년), 정부가 내야 하는 이자가 거액이 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금융자본가들은 당시 정부를 끌여들여 국민의 세금으로 이자를 충당하도록 제도화시키려 한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이전에 대법원에서 헌법 위반으로 판결을 내렸던 '소득세 징수'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고, 이 소득세 징수를 담당하는 기관이 바로 국세청인 것이다. 국세청도 연방준비은행과 같은 해인 1913년에 설립되었다.


 미국 헌법에는 '직접 개인으로부터 징수하는 세금은 균등하게 할당되어야 한다.'라는 취지의 내용이 있다. 소득 액수에 따라 징수액이 달라지는 누진과세에 따른 세금은 위법이다. 과거에 전쟁 당시 정부에서 몇 차례 징수를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을 받아 중단되었다.


 이번에는 겉모습만이라도 헌법 개정에 필요한 상원과 하원 정족수 3분의 2의 찬성을 얻은 것처럼 보이려고 대부분의 의원이 크리스마스 휴가로 의회를 비운 12월 23일에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가결시켰다. 다음날 재무장관 월리엄 맥아두로 하여금 소득세 징수가 수정 제16조로 헌법에 추가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했다.


 헌법을 개정하려면 최종적으로 4분의 3이상의 주가 비준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금융자본가들은 그 단계를 거치지 않았지만 얼렁뚱땅 넘어가 버림으로써 미국 정부에 빌려준 돈의 이자를 소득세라는 형태로 국민으로부터 징수하는 제도를 확립시켰다. 물론 언론은 국세청이라는 새로운 기관을 설립해서까지 시작한 소득세 징수의 목적을 알리지 않았다. 국민들이 낸 소득세가 연방준비은행이 발행하는 통화의 이자로 연방준비은행에 지급된다는 사실을 일절 보도하지 않는 것이다.


  ◇ 소득세 사용처를 조사한 레이건을 암살하라


 "소득세는 국민을 위해서는 한 푼도 사용되지 않는다!"


 이런 중대한 사실을 밝혀낸 것은 외교문제평의회의 회원이 아니었던 레이건 대통령의 공적이다. 그는 대통령 취임 직후에 사업가 피터 그레이스 위원장으로 하는 통칭 그레이스 위원회라는 특별 위원회를 만들었다. 역대 어느 정권도 실행하지 않았던 징수된 세금의 사용처를 조사한 것이다.


 이때 조사를 통해 비로소 개인의 연방 소득세 전액이 연방준비은행에 이자를 지급하는데 사용되며 민중을 위해서는 1센트도 사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렇게 충격적인 사실을 미국인들은 레이건이 조사하기 전까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법원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연방과 주의 소득세가 헌법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국세청은 몇 차례의 재판에서 패소했다. 또 반년 전의 자료에 따르면 전국에서 6,700만 명이 소득세를 고의로 신고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이들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최근들어 소득세와 관련된 재판의 상황이 갑자기 바뀌었다. 대법원의 판례는 부적절하다며 지방법원의 재판관이 세금을 신고하지 않고 수정16조의 위헌성을 일반인에게 널리 알리던 활동가에게 유죄를 선고하도록 배심원들을 유도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하급 법원의 재판관이 대법원의 판단을 부적절하다고 단정하는 것이니, 헌법을 지키는 위치에 있는 재한관이 헌법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일까? 연방 소득세가 이자 지급에 사용되는 것은 분명하다. 소득세로 이자를 전부 감당할 수 있는지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연방준비은행이 정부에 설정한 이자율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연방준비은행은 매년 인쇄되는 지폐의 양(즉 정부에 빌려주는 금액)을 공표하지 않고 있다. 어느 정도의 금액을 정부가 빌려서 얼마만큼의 이자가 발생하고 있는지 아무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이자만 해도 이런 상황이니 원금은 계속 쌓여가고 있지 않을까 싶다.


 영화<007 골드핑거>에서 악당이 노리는 포트 녹스의 금괴는 달러가 금본위제였을 무렵에 필요에 따라 저축했던 미국 국민의 금괴다. 론 폴 하원의원에 따르면 매년 재무부가 이 금괴를 의무적으로 조사해야 함에도 최근에는 전혀 조사를 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연방준비은행이 원금이 담보로 포트 녹스에서 금괴를 가져갔기 때문에 지금 포트 녹스는 텅텅 비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조금 관계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일본도 징수한 세금의 용도를 한번 조사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어쨌든 이 사용처 조사가 원인인지는 몰라도 취임한지 석달도 지나지 않은 3월 30일에 한 남자가 레이건에게 22구경 총탄 여섯 발을 발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레이건을 호위하던 세 명의 경호원이 총알에 맞았는데, 그중 한 명은 뇌에 총알이 박혀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또 레이건도 총알이 폐까지 도달했지만 다행히 심장에서 9센티미터 떨어진 곳이었기에 긴급 수술로 총알을 빼내어 살아날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목숨이 걸린 대수술을 받는 수술대 위에서 레이건은 수술 준비에 바쁜 스태프에게 "당신들이 모두 공화당원이었으면 좋겠군."이라는 농담을 건넸다고 하다. 이에 집도의가 "대통령 각하, 오늘은 저희 모두 공화당원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나중에 보도되었다. 수술 당시 보여준 그의 침착성과 유머가 레이건의 평가를 크게 높여줬음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다.


 이상한 점은 그 자리에서 체포된 범인의 배경이다. 범인으로 지목된 존 힝클리 주니어는 정신 장애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레이건과 '아버지'부시가 각축을 벌였을 때 '아버지' 부시에게 거액의 정치 헌금을 했다. 또 힝클리의 형은 사건 당일 저녁에 '아버지'부시의 둘째 아들인 닐 부시와의 식사 약속이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부시 집안과 힝클리 집안 사이에 서로 교류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재판에서 범인인 힝클리 주니어는 정신 장애를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데이비드 록펠러의 심복인 '아버지'부시를 부통령으로 앉힌 까닭외교문제평의회 회원이 아닌 레이건이 만에 하나 이상한 행동을 시작했을 때를 대비한 금융자본가들의 보험이었던 것이다.


 레이건은 이 암살 미수 사건으로 겁이 났는지 이후에는 금융자본가들의 신경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반대로 암살 미수 사건 발생 2년 뒤인 1983년 3월 23일에 통칭 스타워즈 계획이라는 거액의 군사비가 필요한 전략 방위 구상을 발표해 국방 예산을 대폭으로 증가시킴으로써 군수 산업을 즐겁게 했다.


 이 구상이 발표되었을 때 유명한 천문학자인 칼 세건은 "지구 뿐만 아니라 우주까지 파괴하려는 광기의 계획"이라고 비난했다. 과학자 뿐만 아니라 국방부 내부에서도 비판적인 의견이 나왔을 정도였다. 당시는 물론 현재의 과학 수준으로도 실현 불가능한 방위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 국세청 폐지를 외치며 대통령에 출마한 론 폴 의원


 수정 제16조는 위헌이며 국세청과 소득세 징수도 헌법 위반이므로 즉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2008년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한 열혈 사나이가 있었다. 바로 론 폴 하원의원으로, 내가 존경하는 유일한 현역 정치가다. 그는 인터넷상에서는 독보적인 지지율을 자랑했다. 또한 공화당 후보 11명 중에 가장 선두라고 자타가 공인했던 줄리아니가 1월 말에 선거전에서 탈락한 뒤에도 살아남아 선거 활동을 계속했지만, 언론이 의도적으로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도 많다.


 여담이지만, 많은 선거 자금을 사용해 공화당 대통령 후보 레이스에서 선두를 달리던 줄리아니가 초반전인 아이오아 주와 뉴햄프셔 주는 처음부터 버렸으니 승리하지 못한 것도 이해할 수 있지만, 전력을 다했을 플로리다 주에서도 3위에 그친 것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정책 면에서 방향이 같은 존 맥케인이 선두 경쟁을 했으니 패배의 원인이 정책이 안닌 것은 분명하다. 혹시 줄리아니가 동시다발 테러와 관련이 있다는 의혹이 알려진 것은 아닐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2월 5일의 슈퍼 화요일이 지난 시점에서 살아남은 공화당 후보는 세 명이다. 존 맥케인과 마이크 허커비, 국세청 폐지를 주장하는 텟사스 주 출신의 하원의원 론 폴이다.


 론 폴의 주장은 명확하다. 국세청의 철폐와 소득세 폐지, 연방준비제도의 제검토,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미군의 철수, 국제 연합과 나토에서 탈퇴, 자유무역 추진, 사형제도 폐지, 지방 자치 확대, 연방 정부의 권한 축소다. 다만 이런 훌륭한 정책 외에 총기류 규제 철폐와 임신 중절 금지 같은 시대착오적인 정책도 있었다. 그의 정책의 기본인 입헌주의가 어떤 것인가 하면, 미국이 건국되었을 때 제정된 헌법의 정신으로 되돌아 가자는 것이다.


 내정의 충실과 개발에 전념하고  대외 문제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당시의 자세로 되돌아가자는 주장인 것이다. 이는 벤저민 프랭클린 등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같은 입장이다. 그들은 유럽의 금융자본가들이 신흥 국가 미국을 지배하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이는 당시에 프랭클린 등이 남긴 문서와 연설을 봐도 명백하다.


 미국 헌법은 개인의 인권을 국가의 이익보다 중시하는 매우 진보적인 헌법이다. 전 세계의 독재 국가들은 그 정신을 배워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헌법이라고는 해도 그것을 그대로 현대에 적용하기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인다. 바로 이것이 론 폴의 주장이 일반인들에게 그다지 받아들여지지 않은 원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현재 미국의 정책과 그의 정책을 더해 둘로 나누는 편이 딱 좋지 않았을까 싶다.


 다만, 조금 걱정이 되는 점은 그가 공약 중 하나로 연방준비제도의 제검토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금융자본가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다.


<세계 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  기쿠카와 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