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도서/이 세계의 비밀

이 세계의 비밀(일본의 역사에서 '그들'의 활동)

생활건강 연구가 2019. 11. 15. 10:37

99% 사람들이 모르는 이 세계의 비밀

(일본의 역사에서 '그들'의 활동)


 

  ◇태평양 전쟁은 조작된 싸움이었다?


 태평양 전쟁은 일본과 미국의 대립 구도로 조성된 '조작된 싸움'이었다. 1930년대 미의회에서 일본과의 전쟁을 강하게 밀어붙인 인물 중 한 명이 에이브릴 해리먼이었다. 그는 조지 부시의 아버지인 프레스코트 부시가 경영하는 해리먼 은행의 사장이었다. 해리먼 은행의 지배하에 있었던 군사사업은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해 무기를 제조하고 있었다. 한편 부시 일가는 일본에도 군사 물자를 팔았다. 그들은 미국과 일본 양쪽에서 비즈니스를 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과의 개전론'을 제창한 콜든 헐 국무장관은 부시 일가의 고문 변호사였다. 이때부터 이미 그들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암약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일본 입장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은 자국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으며 구미의 거대한 이권과의 투쟁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는 그것 마저도 '그들'이 일본의 군국주의 인사들을 조종한 결과인 것이다.


 일본과 미국의 전쟁으로 서로에게 사용되는 무기는 모두 부시 일가가 만들고 전쟁이 격화될수록 부시 일가로 거금이 굴러들어가는 가계 구조였다. 게다가 그 수익은 부시 일가만 아니라 '그들'의 주머니도 채워주는 구조였다. 이런 구조는 군산복합체인 그들의 계획이 통했다는 걸 의미한다.


 그들이 일본군에 납입한 군사물자는 사토미 하지메가 대금을 전액 지불했다. 일본이 한국과 중국을 침략해 건국한 만주제국에서 마약 밀매를 담당하며 일본의 전쟁자금을 댄 것도 사토미였다. 사토미는 부시 일가와 CIA의 파트너였다.(중략)


 만주에서의 아편 판매를 통해 거액의 부를 챙긴 사토미는 그 후 상해에서 아편 판매 대부로 군림했다. 이러한 소업을 제쳐두고 태평양 전쟁이 정의의 전쟁이며 성스러운 전쟁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방만함에도 정도가 있는 거이다. 아무리 사람들이 아시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성전이었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또 종군 위안부나 난징 대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이야기를 제처두고서라도 전쟁에 협력하는 일본인이 있는 이상, 거기에 정의 같은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관동군의 재원은 대부분 아편에 의존하는 상태였으며 아편의 산지를 찾듯이 중일 전쟁의 전선은 확대되었다. 수십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을 아편을 이용해 폐인으로 만든 '20세기의 아편전쟁'이기도 했다. 또한 종군 위안부라든가 관동군의 731부대의 만행 등 이런 역사를 돌아보지 않고 중국이나 피해를 입은 아시아의 이웃 나라들과 화해는 성립될 리가 없다.


 관동군은 이러한 일들을 사토미와 고마다에게 맡기고 헌병이나 특무기관원과 함께 자금을 조달해 왔다. 이 외에도 아니키스트인 오스기 사카에, 이토 노에 부부를 참살한 아마카스 마사히코 등이 중국에서 권력을 휘두른 것은 유명하다. 사토미는 아편으로 얻은 이익의 절반을 장제스에게, 나머지 반을 일본의 끄나플이었던 왕징웨이와 관동군에게 상납했다. 물론 장제스와 왕징 웨이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한 그들의 수하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 일본이 하고 있는 일과도 비슷하다.


 그 후의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적으로 공격하게 된 것은 모두 만들어진 싸움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전쟁을 걸어왔다'고 주장하는 미국의 주장과 '내가 맞다' '우리들은 틀리지 않았다'는 식의 자기 주장만 하는게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다. 당시의 미군은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일본군의 공격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과의 전쟁이 그들의 이익을 보장했기 때문에 모른척하고 수많은 목숨을 돈과 바꾼 것이다.


 부시 일가를 중시으로 암약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그대로다. 당시의 미국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경제 불황이었던 미국을 뉴딜 정책으로 회복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시선을 밖으로 돌려야 했다. 남은 방법이 전쟁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불황을 탈피하기 위해 두 나라의 대립 구도를 부추켜 전쟁으로 내몰더라도 그로선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내분이 생기면 생길수록, '그들'의 부는 축적되고 위치는 확고해지며 이득이 되었다.


 루즈벨트는 하와이에 태평양 함대를 집결시키는 것을 반대한 제임스 리처드슨 태평양 함대 사령관을 경질시켰다. 사정을 모르는 허즈번드 킴멜 제독을 후임으로 임명하는 등 선제 공격을 유도하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 측의 진주만 기습의 주모자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다. 그는 과거에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유학을 했고 주미 일본대사관 무관 근무를 했었다. 그 시절에 미국의 산업 생산력과 기술력, 경제력을 직접 확인한 인물이며 친미파 중 한사람이었다. 그는 미국과 일본의 국력이 차이가 많이 난다는 점과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주장한 '단기 결전, 조기 평화'는 이런 배경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결국 일본이 처참히 패한 것은 그가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도 조종당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일본이 선제 공격을 했기 때문에 복수가 필요하다'는 논리로 국제 사회에서 문제를 정당화한 사건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공격이었다. 당시 일본은 거듭된 패전으로 싸울 의지를 잃어가는 시기였다. 국내에서 반전 여론이 확산으로 전황을 극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본측의 의도가 아니라 미국측의 의도였으며 '그들'의 의도였다.  


 일본은 1945년 3월 미국에 휴전협정을 요청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은 이미 패배를 인정한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였고 원자폭탄 공격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은 '그들'이 모종의 실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2번의 원자폭탄을 투하할 필요는 없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 보이'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 맨'은 서로 다른 2종류의 원자폭탄으로 최초로 인체 실험을 한 핵무기다. 처음부터 이 두가지 원폭을 투하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는 것은 여러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원폭에 의한 피해 실험 자료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전후의 피폭자를 대하는 사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히로시마 대학의 명예교수인 시바타 신고는 '마이니치신문'(1994년 9월 6일)에서 1945년 원폭 투하는 인체 실험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 공격을 한 목적은 무엇일까. 하나는 전후 세계에서의 미국의 패권확립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목적은 원폭의 효과를 모르기 때문에 알기 위해선 무수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인체실험이 필요했다. 점령 후 미국군의 행동은 첫 번째로 원폭의 참상에 대한 보도를 금지하고 인체 실험에 대한 정보를 독점했다.


 두 번째로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화상과 방사능 장애의 치료 방법을 필사적으로 연구하던 히로시마,  나가사키 의사들에게 치료 방법 발표와 연구 교류를 금지함과 동시에 사망 피해자의 케로이드 피부나 장기, 생존 피폭자의 혈액과 의료 기록을 몰수했다.


 세 번째로 일본 정부로 하여금 국제 적십자로부터 의약품의 지원을 거부하게 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실험동물'을 치료하는 것만으로는 실험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군은 전력을 다해 피폭치료를 방해한 것이다.


 네 번째로 피폭자를 치료하지 않고 마치 실험동물처럼 관찰하는 '원폭상해조사위원회'를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설치하는 것이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관찰하는 목적 자체가 피해자의 인권 유린이지 않을까.


 히로시마에서 학교를 다닐 때(14살), 원폭이 투하되었고 지금도 원폭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시인 하시츠메 분은 미군시설 '원폭상해조사위원회'에 대해 대음과 같은 사실을 밝혔다. '소녀 14살의 원폭 체험기'에서 발췌한 내용을 보면


 "나는 히로시마에서 살아남은 사람 중 한 명이다.(중략) '원폭상해조사위원회'는 일본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인데, 전후 히로시마에 주둔한 미군은 곧장 죽음의 길 히로시마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원폭상해조사위원회'를 설ㅊ해 방사능의 영향 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땅을 기어다니며 살아가는 생존자들을 미군시설로 연행해 몸에서 혈액을 채취했다. 또 상처나 케로이드 피부, 성장기의 아이들의 유방이나 체모 발육 상태를 확인했으며, 피해자가 사망하면 그 장기를 적출하여 여러가지를 조사하고 기록했다.


 그때 우리들은 인간으로써가 아니라 단순한 조사 연구를 위한 실험용 쥐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치료를 받은 것이 전혀 없었다. 미국은 이러한 조사 기록을 독점하기 위해 나가사키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막고 국제적 지원마저 방해하며 원폭 보도를 일절 금지했다. 그리고 일본 정부도 이에 협력했다. 이렇게 우리들은 국 내외로부터 격리된 상태로 아무런 지원과 보호도 받지 못한채 방치되었고 방사능 피해의 실험 대상으로 조사받고 감시당하며 기록 당했다.


게다가 그것은 전쟁이 끝난 뒤에 이루어졌다. 우리들은 타버린 뒤의 풀을 뜯어먹고 빗물을 마시며 굶주림을 견뎠고 상처는 자연치유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50년이 지난 지금 '원폭상해조사위원회'는 현재 미일 공동의 '방사능 영향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데 그들은 지금도 우리들의 상태를 조사하고 있다."


 원폭 투하를 명령한 해리 투루먼 대통령은 원폭의 참상에 대해 보도하는 것을 일절 금지했고 피폭 치료를 철저하게 방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 신조나 자민당의 행동은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이것이 일본의 현재 상황이며 지금까지 일어난 일이고 본래 구별할 이유조차 없는 거짓된 좌 우 진영이 펼치고 있는 정치의 말로다. 현재 일본은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 인해 당시와 똑같은 실험대에 올라와 있다. 하지만 우민은 아직도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이 세계의 비밀>  우츠미 사토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