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도서/나는 현대의학을 믿지 않는다

나는 고백한다

생활건강 연구가 2017. 1. 21. 06:30


 나는 고백한다




  나는 현대의학을 믿지 않는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현대의학에 반대하는 이단자다. 따라서 내가 이 책을 쓰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현대의학의 주술에서 해방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처음부터 현대의학을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믿지 않기는 커녕 오히려 열렬한 신자였다. 의과대학생 시절 디에틸스틸베스트롤이라는 여성  합성 호르몬제 연구가 활발했다. 현대의학을 믿는 나는 이 약에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20년 후, 임신 중에 이 약을 투여 받은 여성이 낳은 아이들에게서 자궁경부암이나 생식기 이상이 지나치게 많이 발견되었다. 당시의 나로선 꿈에도 생각치 못한 일이었다.


 연구생 시절, 미숫아에 대한 산소요법이 최신 의료설비를 자랑하는 큰 병원에서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 치료를 받은 약 90%의 미숙아에게서 약시나 실명 등 중증의 시력 장애가 발생했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병원은 치료법에서 원인을 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다.  


 한편 의료 수준이 열악한 근처 병원에서는 미숙아 망막증 발생률이 10%미만이었다. 발생률이 애 이토록 차이가 나는지 교수에게 물었다. 그는 "제대로 된 치료법을 쓰지 않은데다 발생률도 정확하게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이야."라고 했다. 나는 그 답을 믿었다.


 미숙아 망막증이 고농도 산소의 투여로 인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로부터 1,2년 후의 일이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병원은 최신식의 고가 플라스틱제 보육기를 설치했기 때문에 산소가 새지 않고 보육기 안에 가득하여 미숙아를 실명시켰다. '수준 미달의 병원'에서는 구식의 틈이 많은 덮게가 달린 욕조 같은 보육기를 사용해 산소가 많이 샜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미숙아를 실명에서 구해준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현대의학을 계속 믿었다. 그 후, 나는 어느 연구 그릅에 참가해 과학 논문을 작성했다. 주제는 미숙아의 호흡기병에 테라마이신이라는 항생제를 사용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논문 안에서 우리들은 '이 약에는 부작용이 없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그 후의 연구에서 테라마이신을 비롯한 모든 항생제는 미숙아 호흡기 감염증에는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이 확인 되었다. 테라마이신이 함유한 테트라사이클린계 항생제에 의해 수천명의 아이들 치아가 황록색으로 변색되었다. 뼈에 테트라사이클린 침착물이 생기는 것이 확인되었다. 부작용이 나타나기 전에 논문을 쓰면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현대의학에 대한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편도선, 흉선, 림프절에 방사선 치료가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이 치료법에 대해 교수들은 '방사선을 쬐는 것은 위험하지만 치료에 사용되는 정도의 방사선은 전혀 해가 없다"고 단언했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러나 전혀 해가 없는 방사선이라도 10년 20년 후에는 갑상선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그 후의 연구에서 판명되었다. 마침내 현대의학의 몰고 온 무수한 불행의 씨앗을 잘라낼 시기가 도해한 것이다.


 이렇게 깨닫자마자, 내가 방사선으로 치료했던 환자들이 떠올랐다. 그들 중 몇 명은 갑상선종을 치료하기 위해 나에게 다시 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왜, 다시 치료받으러 와야 하나? 그 고통의 원인 제공자가 바로 나인데!" 


 나는 더 이상 현대의학을 믿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첨단 의료란 멋진 것이고, 그 기술을 가진 명의에게 치료받으면 건강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의료 행위의 당사자인 의사들이야말로 건강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대의학에서 행하는 치료는 효과가 없는 경우가 많다. 효과는커녕, 치료받은 뒤 오히려 위험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게다가 병이 없었던 환자라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치료부터 하려 들기 때문에 그 위험성은 점점 커진다.


 현대의학을 구성하는 의사, 병원, 약, 의료기구의 90%가 사라지면 현대인의 건강은 당장 좋아질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현대의학은 과잉 진료에 몰두하고 있으며,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중증의 환자에게만 하도록 되어 있는 특수한 치료를 가벼운 증상의 환자에게도 당연한듯이 행하고 있다.


 '의료 공장'이 되어버린 병원에서 건강을 되찾은 환자는 있을리 없다. 이 공장에서는, 환자를 병을 고치려 온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저 의료 공장의 경영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재료로 간주할 뿐이다. 이는 의료 공장의 현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임신부는 병원에 가지 않는 것이 좋다. 환자로 취급받을 뿐이다. 의사에게 있어 임신과 출산은 9~10개월에 걸친 '병'이고, 임신부는 환자일 뿐이다. 정맥주사와 태아 감시장치, 각종 약물, 거기다가 필요도 없는 회음절개 같은 치료를 받고 나면, 마지막에는 의료 공장의 단골 상품인 제왕절개가 기다리고 있다.


 감기에 걸린 사람도 병원에 안 가는 것이 좋다. 의사는 대부분 항생제를 투여한다. 항생제는 감기나 인플루엔자에 거의 효과가 없다. 오히려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감기를 악화시킬 뿐이다.


 산만한 아이가 선생님을 귀찮게 한다고 해서 병원에 데리고 가면 큰일난다. 지나친 약물 투여가 반복되어 결국에는 아이들을 약물 중독자로 만들어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신생아가 꼬박 하루 동안 모유를 안 먹었다고, 혹은 육아책에 씌어진 대로 체중이 증가하지 않았다고 해서 의사의 말대로 할 필요는 없다. 의사는 모유의 자연적인 분비를 억제하는 약을 줄지도 모른다. 모유가 잘 안나오게 된 엄마는 아기를 분유로 키우라는 지시를 받게 되고, 결국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건강 검진은 의미 없는 행사다.  접수할 때부터 함부로 취급받다가 정작 의사에게 진찰받을 때에는 긴장하여 혈압이 평소보다 올라가게 된다. 결국 혈압을 내리기 위해 대량의 강압제를 맞고 돌아오는데 이렇게 해서 성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임포텐스는 심리적인 원인보다 이러한 강압제 등의 약물 부작용에 의한 것이 더 많다. 나이가 들어서 임종을 맞이할 때 병원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의사는 "하루에 500달러의 입원비를 내면, 최신의 의료기구가 완비된 병실에서 의료진들이 당신의 유언을 들어줍니다. 안심하십시요"라고 할 것이다. 결국 의료진이란 가족을 대신해 노인의 임종을 지켜봐주는 임금 노동자에 불과하다.


 최후의 순간에 가족이 아닌 남에게 유언을 남기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유언은 심전도 모니터가 내는 신호음 정도로 작을 것이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둘도 없는 소중한 존재인 가족 사이를 왜 갈라 놓는단 말인가. 의료 공장인 병원에게 환자의 가족은 병원비를 내주는 소중한 존재일 뿐이다.


 "의사 선생님은 무서워서 싫어요." 아이들이 이러한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그들의 맑은 감성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껴 의사가 무서운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어떠한가? 공포감은 그렇게 간단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른들도 실지로는 의사를 두려워한다. 그런 사실을 남에게 말하지 않으며 자기 스스로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른들은 의사에게서 관심을 돌려, 이상이 있다고 느껴지는 자신의 몸상태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사람은 무서운 일이 있으면 피하고, 무시하고, 도망가고, 애써 대단한 것이 아닐 거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기에 누군가 적당한 사람을 찾아 위로받으려 한다. 환자의 이런 성향이 결국 의사로 하여금 주도권을 쥐게 만드는 것이다.


 환자는 의사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 "선생님, 제 몸 상태가 어떻습니까?  이제 스스로 건강을 관리할 수 없으니 선생님께 맡기겠습니다. 선생님께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조치를 취해주십시요." 그러면 의사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약의 부작용에 대해 설명하지 않은 것을 지적당하면 의사는 이렇게 변명한다. "만일 제대로 설명하면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나빠집니다." 이 말은,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지식이 아니라 신뢰에 바탕을 둔다는 의미다. 환자가 "나는 의사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나는 의사를 믿는다" 고 말한다는 사실에서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환자는 의사가 신뢰에 바탕을 두지 않고 자신을 대한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의사는 신뢰에 바탕을 두기는커녕, 환자의 이런 마음을 악용하고 있다. 환자의 신뢰를 잃으면 의사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만일, 환자의 신뢰를 배신한다면 의료 행위 중 적어도 90%는 불필요한 것이다. 그 불필요한 의료 행위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위험성마저 있다는 사실이 공개될 것이다. 더군다나 현대의학은, 병을 고쳐주는 의술이 아니다. 일종의 종교이기 때문에 환자의 신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종교란, 인간의 정신세계 혹은 일상에 불가해하고 신비로운 현상에 조직을 총동원하여 대처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현대의학교'는 삶과 죽음에 따른는 모든 육체적인 생리변화라는 가장 불가해하고 신비로운 현상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인류학자인 제임스 프레이저는 <황금 가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종교는, 인간을 초월하는 힘에 의지하려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에 따르면, 현대인은 삶의 방식에 방향을 관리하는 힘에 의지하려고 현대의학교에 연간 수천억 달러에 이르는 거액의 헌금을 내고 있는 것이다. 의료비라고 불리는 이 막대한 헌금은 뭔가 특별한 목적으로 쓰여야 하지 않을까.


 모든 종교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인간의 오감을 초월하는 것이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현대의학교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 가르침에 따라 "왜"라는 질문을 의사에게 던져봐야 한다.


 "왜, 이 약을 먹어야 하는가?" "왜, 이 수술을 받아야 하는가?" "왜, 이 치료가 필요한가?" 의사에게 이런 질문을 반복하면, 결국에는 믿음에 균열이 생겨 의사와 환자의 사이가 나빠지는 사태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러면 의사는 전문 지식을 방패삼아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환자는 의사를 신뢰하면 됩니다." "왜?"라는 질문을 하는 것은 현대의학의 주술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의사가 환자의 질문에 대해 "의사를 신뢰한다면 그걸로 됐습니다"라고 대답한다면, 몸 상태가 조금이라도 허락하는 한 조금이라도 빨리 의사로부터 도망가야 한다. 왜냐하면, 의사가 이런 틀에 박힌 말을 할 때야말로, 환자에게 충분한 설명도 하지 않고 위험한 치료를 할 바로 그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지로 의사에게 도망쳐 나온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의사가 쓴 주술사의 가면과 그 안에 숨어 있는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전율한다. 지금 자신의 몸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나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태에 불안을 느낀다. 결국에는, 의사의 교묘한 설명에 경외감마저 느끼며 허무하게 굴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사라고 불리는 주술사의 생각대로 되게끔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현대의학의 주술에서 얼마든지 스스로 해방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몸을 위하는 일이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진찰실이나 진료소 병원에 가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그 준비는, 생명보험에 가입하는 것이 아니다. 의사와 대화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 임기응변을 익히는 것이다.


 우선 의사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대의학이 종교라는 사실을 알면, 보다 효다 자신을 지킬 수 있다. 물론, 현대의학은 절대 스스로 종교라고 말하지 않는다. 병원도, 종교가 아니라 사람을 고치는 의술을 위한 건물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다.


 현대의학교는, 환자의 신앙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종교가 그렇겠지만, 현대의학교의 경우는 신자들의 신앙심에 의존하는 정도가 크다. 때문에 사람들이 단 하루라도 믿음에 회의를 느낀다면 의료제도 전체가 붕괴해버릴 정도이다. 이런 사정은, 다음의 세 가지 의문에 대해 생각해보면 바로 이해할 수 있다.


 * 다른 곳에서라면 당연히 의심받을 만한 행위가 의료 행위라는 이유로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

 * 환자들은 대부분 수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선뜻 수술에 동의하고 있다.

 * 사람들은 약 성분인 화학물질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연간 몇 천 톤에 달하는 약을 소비하고 있다.


 왜일까? 그것은 사람들이 현대학교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학은 치료법의 정당성을 객관적으로 명확히 할 것을 강요받은 적이 없다. 이 책의 의도는 바로 거기에 있다. 나는 현대의학은 몸을 맡길 가치가 없는 종교이며, 따라서 이런 종교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여 증명하려고 한다.


 의사가 일반인에게 뭘 숨기고 있는지에 흥미가 있거나, 단골 의사가 위험한 사람인지 아닌지 알고 싶거나, 자신의 몸을 지키는 방법을 배우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통해 귀중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현대의학을 믿지 않는다<의학박사 로버트 S. 멘델죤>

 


 독후감 후기


 작가는 현직 의사로서, 처음엔 현대의학을 열렬히 믿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의료현장을 지켜보면서, 현대의학은 병을 고치는 의술이 아니고 종교하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나는 작가의 이런 주장에 처음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현대의학을 병을 고치고 건강을 목적으로한 의학이 아님을 나도 경험으로 깨달은 사람중에 한사람이다. 그러므로 치료를 의심할줄도 알아야한다고 사람들을 만나면 이야기 해주곤 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겉으론 인정하는척하면서도 마음속 깊이 현대의학을 믿고 있음을 발견했다.


 작가는, 그러한 이유를 아주 명쾌하게 나를 깨우쳐주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당연히 의심받을 행위가 치료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도, 환자가 이를 믿는 이유는 바로 "현대의학교"이기 때문이다. 즉, 종교라는 말이다.

 종교는 환자의 믿음으로 유지되는 집단이다. 아무리 사이비 종교라 할지라도, 그 신자들이 의심하지 못하고 믿고 있다면 번창하게 된다. 오늘날, 현대의학교의 신자들인 환자들은, 치료에 어떤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 사실대로 알지도 못하고 자기 건강과 생명을 맡기고 있다. 


 작가는, 냉철한 눈으로 이런 위험을 알고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의사, 병원, 약, 의료기구의 90%가 사라지면 현대인의 건강은 당장 좋아질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 말 뜻을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진실과 거짓을 믿는 중요한 갈림길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진실을 모르면, 평생을 속아 살면서 자신만 바보가 되는 무서운 세상이다.


생활치유연구가  생태농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