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도서/나는 현대의학을 믿지 않는다

대학병원에 가면 정말 병을 고칠 수 있을까

생활건강 연구가 2017. 4. 7. 06:30

 

 



대학병원에 가면 정말 병을 고칠 수 있을까


 

  ◆ 독후감 후기


  저자는, "의사들의 연구대상 목적으로 이용당하고 싶지 않으면, 대학병원이 최고라는 믿음은 버려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는 치료과정에서 환자는 항상 생명 위협에 노출 되어 있음을 잊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다. 


 대학병원을 신뢰하고 있는 요즘의 풍토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의과 대학생들이 실습과 연구를 하는 곳이므로 환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목적에 이용 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학병원이라 해도, 그곳은 어디까지나 영리를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자는 맹신과 복종이 아니라 자신에게 합리적인 치료를 하고 있는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그게 아니다. 의사의 권위에 순종하고 그들을 선의의 천사처럼 믿고 싶어한다. 환자를 통제하기 좋아하는 병원은 환자들의 이런 심리를 철저히 이용하고 있다. 그래서, 환자에게 필요없는 약을 복용하게 하고, 과잉 수술을 하거나 실험 대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생활치유 연구가  생태농부  





 대학병원에 가면 정말 병을 고칠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병원은 대학병원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의과 대학생들이 공부하고, 의료진도 많다. 게다가 연구는 앞서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 병원이 기묘한 치료를 행하던 시대의 이야기다.


 지금은 사정이 다를다. 생물 수업에 사용되는 개구리나 가재, 돼지의 태아와 같은 신세가 되고 싶지 않으면, 대학병원이 최고라는 믿음은 버리는 편이 좋다.


 병원 내  감염의 발생률이 가장 높은 곳이 대학병원이다. 임상 검사나 약제 제조의 실수도 많다. 환자를 부당하게 취급하는 일이 빈번하고, 환자가 받는 정신적 손실은 더할 나위 없이 심각하다. 게다가 환자는 의사의 목적에 이용되기도 한다. 수술의 적합 여부를 실증하기 위해 소위 치료하고 칭하는 실험에까지 사용된다. 연구 대상이 되는 것이 환자의 뻔한 종말인 것이다.


 대학 병원에 관한 잘못된 상식이 하나 더 있다. 난치병, 기이한 병의 중증 환자는 대학병원에 가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대학병원이라는 곳은, 의과 대학생이나 연수의에게 정통한 치료법이 유효한가를 별도로 가르치는 장소다. 현대의학이 치료법보다 유효한 치료법을 구한다면, 소규모의 병원이나 현대의학을 신봉하지 않는 나라의 병원에 가야만 한다.


 실지로 치료에 임하는 것은 병원이 아니라 의사다. 그렇기에 선택의 기준은, 병원이 아니라 당연히 의사여야 한다. 정말로 좋은 의사라면 자신의 기술을 발휘할 적절한 설비를 갖추고 있을 것이다. 내가 휼륭하다고 판단했던 의사들은, 적어도 대학병원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 않았다.


 교육, 연구, 진료 이 세가지가 대학병원의 주축이다. 하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다. 의사나 병원이 이 세가지 모두에 힘을 쏟으려고 한다면, 정작 병의 치료에는 소홀하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대학병원을 선택한 사람은 주의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의사라도, 그리고 그 의사가 어떤 병원을 소개해도 환자는 치료 과정에서 항상 생명의 위험에 노출 되어 있다. 의사나 간호사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것은 위험하다.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는 처사에는 단호히 저항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입원할 때는 부모가 항상 옆에 붙어 있어야 한다. 내가 근무한 적이 있는 어떤 병원에서는, 아이의 상태가 위독할 때 한해서만 부모가 같이 있을 수 있도록 허가하고 있었다.


 그 병원에 근무할 때 나는 아이들 환자 전원을 위독한 것으로 처리했다. 병원측은 오랫동안 묵인하고 있었으나, 드디어 대결 시간이 다가왔다.

면회는 저녁 7시 30분까지 허용되었는데, 어떤 보호자가 "아이가 울고 있었요. 엄마가 옆에 있어주면 울음을 그칠 텐데... 늦어도 8시반까지는 잠들테니 그때까지 옆에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하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허락했다. 그러나 옆에 있던 간호사들은 "위독한 상태도 아니고 면회 시간도 지났으니, 보호자를 병실에서 나가게 하지 않으면 곤란합니다"라며 반대했다. 나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보호자가 이대로 병원에 남아 있으면 자네는 어떻게 할 건가?"


 "관리 직원에게 전화하겠습니다."하고 간호사는 대답했다. 내가 관리 직원에게 직접 전화를 해서 같은 질문을 했더니, 그는 이사에게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이사에게 전화를 걸어, 역시 같은 질문을 했다. 이사는 "경찰을 불러 그 보호자를 병원에서 당장 내보낼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15분만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사는 내가 이런 사태를 수습해줄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나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나는 지역 텔레비젼 방송국의 활동가로 유명한 보도기자에게 전화를 했다. "울고 있는 아이와 함께 있기 위해, 면회 시간을 1사건 연장해달라는 보호자가 경찰에 의해 병원에서 내쫒길 처지에 있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곧 현장으로 달려갈테니 20분 정도만 그대로 계십시오. "알았으니 빨리 어떻게든 해보시오." 그리고 나서 나는 이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20분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보도진이 밀려들어, 경찰이 보호자를 강제로 내쫒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을 예정이니까요."


 그러자 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알았소,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고 내일 내 사무실로 오시오." 다음날 아침, 나는 사무실로 갔고, 이사로부터 이런 통보를 받았다. "어제의 사건으로 당신을 해고할 생각이오."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뒷수습이 어려울텐데요. 나는 곧 신문사로 가서 대소동을 일으킬테니까요. "정말 그렇게 할 생각이오?. 당신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사는 질려버렸다. "좋소, 당신 환자에게 면회 오는 사람은 있고 싶은 만큼 있을 수 있도록 하겠소. 단, 이 일은 병원 직원들에게는 비밀로 해주시오."


 이것이 사건의 전말이다. 입원 환자에게 있어, 병원의 규칙을 깨뜨리는 일은 생사를 건 문제다. 그것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언제나 옆에 있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도,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가 아니면 안 된다.


 내 경험에 따르면, 가난한 가정일수록 가족간의 결속이 강하다. 자족 중 누군가가 언제나 옆에 있어준다. 그러나 부유한 가정은 그렇지 않다. 중류나 상류 가정은, 가족 전부가 모두 일을 하므로 "일 때문에 바쁘다" 옆에 붙어 있는 것이 귀찮다"며, 간병인을 따로 고용한다. 이것을 계기로 나는, 부유한 가족과 그렇지 않은 가족에 있어서 가족 간의 유대가 왜 이토록 차이가 있는 것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현대의학을 믿지 않는다<의학박사 로버트 S. 멘델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