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우울증’ 시대를 건너는 법
‘집단 우울증’ 시대를 건너는 법
지난 연말 만난 한 고위 공직자는 근래들어 입이 거칠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흠칫 놀랄 때가 있다는 말을 했다. 정치나 사회 얘기만 나오면 부아가 치밀고 의식도 못하는 사이에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오곤 한다는 것이다. 그 주변 친구들도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고 했다. 그는 "한국 사회가 집단 우울증에 빠진 것 같다"며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돌아보면 맨 정신으로 버텨내기 힘든 1년이었다. 사는 것은 신산하고 팍팍해도 이제 어디 내놔도 과히 부끄럽지 않은 민주국가, 정상국가에 살고 있다는 자긍심 하나는 있었는데 그마저 산산조각 나버렸다. 시간은 역류해 1970년대로 되돌아갔다. 표현의 자유, 생각의 자유, 말할 자유, 대통령을 욕할 자유, 인간에 대한 예의, 타인에 대한 배려... 최소한의 상식이자 사회적 합의로 여겨졌던 것들이 차례차례 뒤집어졌다. 사람들은 수치심과 분노, 모멸감, 어떤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진박'이니 뭐니 하는 허접한 말들이 그 위를 덮었다.
소통과 시대정신은 '배신' '의리' 따위 조폭식 용어로 대체됐다. 국회에서 보수의 시대정신을 토해냈던 유승민은 배신자로 찍혀 정치생명이 위태롭다. 더욱 절망적인 점은 역사의 궤도를 역주해아는 폭주기관차를 제어할 장치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는 '양김'이 이끌던 강한 야당이 있었다. 재야단체 등 민주화운동 세력의 도덕적 우위도 확고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참여연대, 경실련 등 시민단체으; 영향력이 커졌다. 민주노총이 생기면서 노조의 발언권도 강해졌다. 그 근저에는 민주화 합리화라는, 사회 구성원 다수가 공유하는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박근혜 대통령이 무슨 일을 하건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약 40%의 콘크리트 지지층이 있다. 여당은 대통령보다 한 술 더 뜬다. 대통령이 돌을 던지면 받아서 다연발 미사일을 쏜다. 야당은 지리멸렬하다. 언론지형은 보수가 절대 우위를 점하는, 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노조의 정치적 발언권은 거의 무시할 만한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시민단체의 말발도 예전 같지 않다. 갖은 명목의 보수적 시민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실제 역할의 크기나 대표성의 정도와 관계없이 여론시장에서 절반의 지분만 인정받고 있다. 민주화 이후 사회구성원 다수가 추구하는 절대적 가치도 사라졌다.
아무리 둘러봐도 현실이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아무리 얘기해도 권력이 눋도 꿈적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절망한다. 절망의 언어적 증상이 욕설과 침묵이다. 그러나 욕설과 침묵은 소통의 언어가 아니다. 감정을 배설하고, 내부로 가라앉는 것이다. 그것은 소통의 가능성이 차단되고 현실의 개선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지만, 그 증상의 발현으로 소통 가능성, 개선 가능성은 더욱 닫힌다.
한국에서 민주세력이 자력으로 정권을 쥔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김영삼 정부는 3당 합당으로 탄생했고 김대중 정부는 DJP 연합으로 가능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정몽준과 연합해야 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민주세력의 집권이 당연시되고 실권이 예외시되는 착시가 나타났다. 그러나 한국처럼 보수의 정치적 기반이 강한 곳에서 민주세력의 집권은 오히려 대단히 예외적인 현상이었다고 보는 게 냉정한 현실인식이다.
올해는 총선이 있다. 당장의 선거,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진보개혁세력에 필요한 것은 정치적 토대를 바꾸는 일이다. 이는 30년, 50년을 내다보고 하는 장기 프로젝트다. 끈질긴 소통과 접근으로 지지기반을 한뼘 한뼘 넓히는 일이다. 역사에는 지름길도, 로또도 없다. 새해에는 욕설과 침묵 대신 조곤조곤한 대화를 많이들 했으면 좋겠다. 긴 안목으로 일상의 정치적 실천에서 보람을 찾는 것이야말로 '집단 우울증'시대를 건너는 최상의 처방이 아닐까 싶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1082052265&code=990100&s_code=ao100